왕초보 드라이버의 미국 운전 도전기록
초보 운전자는 운전대를 잡는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처음 가보는 길, 갑자기 차가 많아지는 도로, 좁은 주차장 등 험난한 코스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고속도로는 감히 혼자서는 절대 진입할 수 없는, 진입해선 안되는 상위 레벨의 코스다. 스키장에서 왕초보가 리프트 잘못 타서 상급자 코스에 올라와 버린 상황을 상상해 보면 고속도로를 마주한 초보운전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초보 딱지를 뗄 때까지는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시내 주행만 하면 되지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은 시내에서 어떤 경로를 찍든 프리웨이가 등장한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주(State) 에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고, 땅이 워낙 넓어 시내도 아주 크다 보니 시내에도 고속도로가 많이 깔려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시내 주행일지라도 고속도로를 마주하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 내가 낄 수 없다는 것이겠지.
집 근처 문구점을 가고 싶었다. 차로 고작 7분 거리인데, 구글맵 경로에는 반드시 고속도로 구간이 등장했다. 대단한 곳도 아니고 고작 다 떨어진 물감 하나 사러 문구점도 혼자 못 가는 신세라니. 문구점조차 혼자 못 가는 신세가 너무 갑갑했지만 주말에 남편이 문구점에 태워다 주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고속도로 정복을 목표로 삼아 보아도 그리 갑자기 정복이 될 리가 있나. 고속도로 정복은 근 몇주 동안 나의 가장 큰 버킷리스트였지만, 정복의 길은 멀고도 멀어 보였다.
'하이 로빈! 어서 와!' 이곳에서 사귄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그녀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열리는 영어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녀에게 아주 깔끔한 영어 발음 덕에 알아듣기 편했다는 고맙단 인사를 건넨 걸 계기로 따로 종종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렸어? 너무 멀진 않았어?' 그날은 그녀를 우리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고 차를 타고 와서 집 앞 주차장에서 내린 그녀를 만났다. '한 15분? 내가 고속도로를 안 타고 와서 좀 걸렸어.' 내가 알기론 로빈은 16세부터 운전을 시작했으니 운전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16세 부터 운전 가능) '왜? 너 운전 경력이 10년이 넘잖아..!' 그 정도 경력인데 왜 고속도로를 안타고 온 걸까.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미국에서 고속도로는 필수 아닌가? '아~ 그냥. 빠르게 달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당연해 보였던 일이 당연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구글맵에 고속도로가 뜨니까. 미국에서는 고속도로를 다들 타고 다니니까. 그러니까 나도 꼭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다들 그러니까 당연히, 반드시 나도 해야 한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로빈을 만난 이후로 구글맵에서 '고속도로 제외' 옵션을 누르고, 지도에 나타난 새로운 경로를 따라 그렇게 갈망했던 문구점에 다녀왔다. 문구점 뿐만이 아니라 한인마트, 중고마켓, 재봉틀 가게 등 가고 싶었던 곳들을 누비고 다녔다. 고속도로에 비해서 조금 돌아가야 되고, 신호에 잘못 걸리면 시간도 더 늘어나지만, 그래도 괜찮다. 반드시의 틀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좋다.
시험 문제의 정답을 고를 때 '반드시' 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어딘가 의심스러웠다. 법으로 정해진 규칙을 제외하고는 반드시가 들어간 지문은 대체로 틀린 경우가 많았다. 무엇이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고, 반드시라고 여기는 법 규율조차도 예외가 생기면 개정되기 마련이다. '반드시'는 없다. 없을지도 모른다고 소심하게 써두고 싶지만 진짜로 없는 것 같다. 다들 당연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이든 '반드시'로 귀결짓지 않기를 바란다. '반드시' 대신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인다면, 없어 보이는 것뿐이니 쫄지 않기를! '반드시' 대신 '예외'를 찾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