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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불끄기


매사 깔끔하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성격인데 오로지 불끄기만은 못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난치병이다. 주말이면 아내는 남편의 동선을 따라 다니며 켜진 스위치를 누르기에 바쁘다. 절약을 호소하며 달래기도 하고 벌금제를 시행하겠다며 협박도 해보았으나 아내의 처방은 약발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는 악을 써대는 목소리만 나날이 높아진다. 

 남편에게 진지하게 질문한 적이 있다. 왜 불끄기를 제대로 못하느냐고. 그랬더니 농청스럽게 너무 가난하게 자라서 그렇단다. 전등불을 마음껏 흥청망청 써보지 못한 게 한이 되어서 그런거 아니겠냐는 대답이다. 보리고개를 넘기며 죽으로 연명하는 집안에서 전등불은 사치였다. 시아버지는  햇기가 떨어지면 불끄고 잠자리에 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불을 밝히고 싶어도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에 대한 허기가 심해졌으며  대낮에도 스위치를 켜는 얄궂은 버릇이 생겼다.   어디 그 뿐이랴. 퇴근도 먼저하기 싫단다. 컴컴한 거실의 공기를 대하면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진다며 요란을 떨었다.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빈 공간에 켜진 불만 보면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아내는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지의 생활 습관은 사남매에게 곤역이었다 .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마다 눈이 따가워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후레쉬 빛으로 얼굴을 정조준하며 등짝을 후려치니 잠을 잘수가 없었다. 꿀맛같은 새벽잠을 방해하는 강렬한 백색 빛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산같은 아버지의  호통에 숨소리조차 죽이며 일어나야만 했다. 반항심과 투덜거림은 사치였다. 아버지가  후레쉬를 사용하는 이유는 전등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절약을  일상으로 여기는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다. 그런데 사람은 닮고 싶지 않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한다. 이제 아내는 이유없이 켜진 공동 현관의 불마저도 타박하는 잔소리꾼이 되었다.

 퇴근해서 보니 욕실에 불이 또 켜져 있다. 범인은 뻔하다. 안방 욕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딱 둘이니까. 아내는 허공에 대고 ‘정신머리를 어디에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로 내지른다. 오늘은 아침부터 지금껏 종일토록 켜두었다 생각하니 화가 양은냄비처럼 끓어올랐다. 딸깍 소리와 함께 불빛이 사라지자 불현듯 마음의 불끄기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경의 ‘여여부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여여'는 '같고 같다'라는 뜻으로 즐거움이나 슬픔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담담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리라.

 아내는 마음에 불이 잘 켜진다. 천성이 다혈질이고 화가 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럴때마다 남편은  소화기 역할을 하느라 부산스럽다.  모닥불, 장작불, 산불 등 형태를 달리하는 불이므로 어즙잖게 대응하면 오히려 불길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만다.  발화점도 죽끓듯 변덕스럽다. 발화점은 물질이 연소하기 시작할 때 온도로서 물질에 따라 다르다. 성냥골, 종이, 나무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철판을 가열하면 성냥골이 가장 먼저 타고, 종이가 그 다음에 타며, 나무는 불이 붙지 않는다. 성냥골의 발화점은 가장 낮아서 셋 중에서 가장 빨리 불이 붙는다. 아내의 발화점은 성냥골보다도 낮다가도 나무보다 높을 때도 있다. 

 결혼 초엔 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 놓고 피우는 모닥불처럼 오래가지 않는  불꽃이 일었다.  원인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다. 아내는  돈의 흐름에 대한 지휘권을 당연지사로 여겼다. 그래서 월급통장 제출을 요구했다 금융권에 근무하며 여유로운 씀씀이를 누리던 남편은 난감해하며 생활비만 입금하갰다며 버텼다. 아내의 압박이 계속 이어지자 남편은 한 달 간의 쓰임새를 공개하며 자치권을 지키려했다. 만만하게 보았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아내는 눈물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줄듯말듯 알송달송한 남편의 태도를 애교로써 뒤집기 한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내 맘같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자 아내는 제 바람에 쓰러져서 악다구니를 쓰며 연소되어 갔다. 그러나 남편이 협상이라는 카드를 제시하였으므로 얼마가지 않고 불은 시들었다.

 첫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여행을 떠났다.  유럽은 가는 곳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남편은 언제 다시 오겠냐며 가는 곳마다 길거리문화와 기념품을 싹쓸이로 경험하고 구입했다.  에펠탑 모형물 앞에서 아내는 하나만 구입하면 된다고 하는데 비해 남편은 유리로 된 것 쇠로 만든 것 등 각양각색을 모두 사고자 했다. 수시로 눈 흘기는 아내의 태도로 여행의 즐거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지펴지던 불이 급기야  로마에서 산소를 만났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기 위해 광장에는 각국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다. 아들이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남편은 빙긋 웃으며 그곳을 향했다. 거기에는 키 큰 흑인 남자가 '원달러 플리즈'라 외치며 손에는 형형색색의 고무 찰흙을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한창 만득이라는 고무찰흙이 유행하고 있던 터라 집에도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물건이었다. 남편의 여행방식을 타박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던 아내의 장작불은 미친듯이  활활 타올랐다.  1달러를 건네는 남편을 향해 단전의 힘을 한껏 끌어올려  '또~~ 사려고 하냐~~'를 연거푸 내질렀다. 외국인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빨려들였다. 공기를 가르는 앙칼진 여자의 외침에 광장의 오케아노스 조각상마저도 놀라는 찰라였다. 아내는 울며불며 시내투어를 위해 대절한 택시에 올라타고 기사에게 '고고~'라고 외쳐댔다.  이리저리 날뛰며 포효하는 짐승같은 아내의 모습에 남편은 안절부절이었다 기껏 1달러에 불붙은 아내를 어찌 해야 할것인가. 급한 맘에 남편은 산소를 제거하고 발화점 미만으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 무조건 잘못했다며 빌었다. 

   반백의 언저리에 선 아내에게 이번에는 큰불이 일어났다 불이 일어나려면 연료가 공급되어야하는데 둘째 아이가 화근을 제공했다 아내와 둘째의 관계가 삐거덕거린 세월은 깊었다 천성으로 행동이 느리고 잠이 많아서 재바르지 못한 아이를 늘 못마땅해하고 타박해왔다 수시로 퍼붓는 불화살을 뽑아내고 불길을 잡느라 남편은 노심초사였다  그런데 슬금슬금 아들에게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며 왕따를 당하더니 급기야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소통을 거부했다 아내의 말에는 육두문자가 섞이고 독해졌지만 아들은 바위처럼 꿈쩍도 않았다 아내의 눈물바람은 차츰 거세지더니 급기야 산불을 내고 말았다 암선고를 받았다 가족력도 없으니 제바람에 일으킨 병인게 분명하다 겁이 나서 떨었고 억울해서 흙바닥에 뒹굴었지만 하늘은 꿈쩍도 안했다  졸지에 수술대에 누워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아내의 맘에 물을 뿌리며 불끄기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워낙 큰 불의 후유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잔불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남편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내의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아내는 살기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결국 금강경 앞에서 뻣뻣하던 마음이 조금씩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기쁨에 들뜨고, 노여움에 불같이 달아올라 어처구니 없는 일을 수없이 저지르며 살았다 슬픔에 젖어 삶을 망치기도 하고, 즐거움으로 환희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껏 불놀이에 빠져 허송세월했음이 느껴졌다 어떤 감정 상태에 있든 그것은 바로 나이다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데 굳이  휘둘리며 별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다 우리가 희로애락 감정 앞에서  담담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여'한 것이다  오늘도  남편은 욕실의 전등을 켜두었고 서슬퍼런 아내의 감시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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