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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미있는 영어어원 이야기

노르만 정복과 영어어휘 발달의 전환점

by 현현

1066년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해 중 하나로, 영국의 사회, 정치, 문화적 지형을 재편한 중추적인 사건인 노르만 정복의 시작을 알린 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기사, 궁수, 말들로 가득 찬 수백 척의 배로 영국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함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해협 건너편에서는 막 북쪽의 맹렬한 침략을 물리친 해롤드 고드윈슨 왕이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해롤드 왕은 강력한 윌리엄 공작이 이끄는 또 다른 군대가 영국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누가 왕관을 쓰게 될지뿐만 아니라 영국 국가 전체의 미래가 결정된다.



노르만 정복의 과정은 1066년 1월 자녀가 없는 에드워드 국왕Edward the Confessor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에는 권력 공백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해롤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드라다Harald Hardrada,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Duke of Normandy, William 등이 영국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에드워드의 죽음은 왕위 계승의 위기를 불러일으켰고 해롤드 고드윈슨은 곧바로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왕위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는 윌리엄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고, 곧바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066년 9월 28일, 윌리엄과 그의 노르만 군대는 영국 남부 해안의 피벤지Pevensey inSussex in southern England에 상륙한다. 한편, 불과 며칠 전, 해롤드 왕은 영국 북부의 스탬포드 다리 전투에서 또 다른 경쟁자인 해럴드 하드라다를 이미 물리쳤다. 앞선 전투와 급격한 남진으로 지친 해롤드 군대는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the battle of Hastings에서 윌리엄의 노르만 군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 전투는 매우 잔인하고 무섭게 지속되었고, 결국 해롤드는 화살에 눈을 맞아 사망하며 앵글로색슨은 패배하게 된다. 이 결정적인 승리로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격하여 1066년 크리스마스 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노르만 정복의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계승을 약속한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윌리엄은 노르망디를 넘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것은 영국의 입장에서 막대한 부와 영향력, 해협을 가로지르는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에드워드의 죽음 이후 드러난 영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윌리엄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영국의 지배 엘리트층은 완전히 새롭게 개편된다. 윌리엄은 노르만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여 앵글로색슨족 귀족을 몰아내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귀족을 인정하게 된다. 런던탑과 같은 공고한 건축물들이 노르만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인구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보장하기 위해 건설되었고, 봉건 제도가 도입되어 왕이 충성과 군 복무의 대가로 가신에게 토지를 부여하는 계층 구조로 사회가 재편되었다.


노르만 정복은 사회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앵글로색슨 귀족과 호족(thegns)들은 땅과 지위를 잃었고, 새로운 노르만 통치자들은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세인, 혹은 호족이라 불리는 thegns 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귀족 계급으로, 중세 후기 사회에서 기사와 거의 같은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군복무 및 기타 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왕이나 백작으로부터 직접 토지를 소유한 지주에 해당한다. 테그는 앵글로색슨 사회 구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지역 지도자, 행정가, 전사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역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분쟁이 발생하면 종종 왕을 지원하도록 요청받기도 했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정복자 윌리엄이 노르만 추종자들에게 재산을 재분배하고 앵글로색슨 귀족을 노르만 영주들로 대체하면서 대부분의 테그는 지위와 땅을 잃게 된다. 이에, 1085년 윌리엄의 의뢰로 작성된 돔스데이 북은 영국의 자원과 토지 소유를 목록화하여 영국에 대한 노르만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결과적으로, 1066년의 노르만 정복은 영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재편한 영국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억되는 매우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영어라는 언어 자체에 미친 파급효과라고 할 수 있다.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물리치고 영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을 때, 그는 새로운 정치 질서뿐만 아니라 영어를 영원히 변화시킬 새로운 언어적 영향력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노르만 정복이 고대 영어와 노르만 프랑스어가 융합되어 더 풍부하고 다양하며 훨씬 더 표현력이 풍부한 언어가 탄생하는 어원 혁명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노르만족이 도착하기 전의 영어는 대부분 게르만어로, 수세기 전에 영국에 정착한 앵글족, 색슨족, 쥬트(Jutes)족이 사용하던 방언에서 유래한 언어였다. 이 고대 영어는 중세 초기 영국의 농업과 공동체 생활을 반영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어휘를 특징으로 한다. 집hus(house), 왕cyning(king), 양sceap(sheep), and 헛간baern(barn)등과 같은 단어는 일상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의 영어는 실용적이었으며 물리적 세계와 즉각적인 경험을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추상적인 개념이나 복잡한 사회 구조에는 적합한 언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르만족의 등장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들이 영국의 법정, 교회, 정부를 장악하면서 프랑스어는 빠르게 권력과 명성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앵글로색슨족 인구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지배층의 엘리트들은 법, 행정, 상류 사회에서 노르만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두 언어는 불안하게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점차 오늘날 우리가 중세 영어라고 부르는 것으로 합쳐지게 된다. 고대 영어와 노르만 프랑스어의 혼합은 특히 통치, 법률, 예술, 사회 계층과 관련된 분야에서 어휘의 엄청난 확장을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노르만 정복의 가장 주목할 만한 어원적 영향 중 하나는 정부와 행정, 그리고 법의 영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법원court, 의회council, 의회parliament, 사법justice, 배심원jury, 감옥prison 등 권력 기관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는 대부분 노르만 프랑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단어들은 노르만 통치 하에서 변화하는 영국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여 새로운 권위를 대표하는 어휘를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법률 언어는 이러한 프랑스어 용어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으며, 이는 이 역사적 만남의 영향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융합의 영향은 아마도 음식에 대한 단어의 이분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소를 키우던 앵글로색슨 농부들의 고대 영어 단어는 그냥 소였다. 이 소가 노르만 영주의 식탁에 오르게 되면서 소고기는 프랑스어 보프에서 유래한 단어인 비프가 된다. 이러한 패턴은 양과 양고기, 돼지와 돼지고기에서도 반복된다. 영어를 사용하는 농민들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들이 소비하는 상품을 지칭하는 단어의 구분은 당시의 계층적, 사회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앵글로색슨족 농민들peasants은 소cows, 양sheep, 돼지pigs를 계속 키웠지만, 프랑스 지배자들은 소고기(프랑스어 보프에서 유래)beef(from French boeuf), 양고기(프랑스어 무통에서 유래)mutton(from French mouton), 돼지고기(프랑스어 포크에서 유래)pork(from French porc) 라고 부르는 완제품을 즐겼다. 살아있는 동물과 가공된 형태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영어를 사용하는 평민은 노동을 수행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귀족은 그 결과를 향유하는 노르만 잉글랜드의 사회 계층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에도 영어로 동물과 육류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이중적인 용어는 노동자와 엘리트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계층적 구분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르만족의 영향은 통치와 음식 외에도 추상적인 개념과 세련된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영어의 능력도 확장시켰다. 아름다움beauty, 용기courage, 명예honor, 충성심loyalty 과 같은 단어가 노르만 프랑스어를 통해 영어에 들어와 새로운 의미와 표현의 층위를 추가했다. 이러한 용어를 통해 이전의 영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웠던 이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어휘의 도입은 중세 영문학의 중심이 된 기사도, 로맨스, 궁정적 사랑 개념을 논의하는 데 필요한 어휘를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영국의 문화적, 지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어와 노르만 프랑스어의 결합으로 인해 영어에는 각각 약간씩 다른 의미를 지닌 동의어가 점차 확산되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ask는 노르만 프랑스어 inquire와 공존했고, start는 commence와 함께 사용되었다. 한 단어는 더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다른 단어는 더 형식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 쌍은 다른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어만의 유연성과 뉘앙스를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성 덕분에 영어 사용자는 문맥과 청중에 따라 다양한 어휘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오늘날에도 영어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남아 있다.


노르만 정복의 언어적 영향은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영어와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점차 통합되면서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14세기 후반 제프리 초서로 대표되는 중세 시대에 영어는 고대 영어의 게르만어 뿌리와 노르만 프랑스어의 라틴어적 우아함이 결합된 풍부한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이 새로운 언어의 힘을 증명하는 작품으로, 유머와 진지함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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