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 주위를 맴도는 소리
시를 외운다는 일, 시를 낭송한다는 일
"혹시 외우고 있는 시가 있으신가요?"
나는 아직 저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한 적도 없다.
내가 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나를 놀라게 한다. 이걸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중학교 3학년 시절 수학 선생님은 어느 날 정말 뜬금없이 '시를 외우는 일', '시를 낭송하는 일'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즐거우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어느새 교실은 선생님의 시 낭송회장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운 이 모습이 내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낭송하던 선생님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돈다.
지금 기억하고 있는 시는 모두 고등학교 시절에 외웠다. 국어 선생님은 시를 진정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방법은 외우는 것 만한 게 없다고 하셨다.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국어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다소 실용적인 생각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버스로 통학하던 시간을 활용해 틈틈이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었고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으로 이어졌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몇 개 더 외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님의 침묵>과 <서시> 뿐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더는 시를 외우지 않았다.
<님의 침묵> 과 <서시>는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지만, 가끔 떠오르는 추억 같은 것이 되었다. 시를 외운다는 것이 삶을 즐겁고 낭만적이며 풍요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국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님의 침묵>과 <서시>를 떠올린다. 귀가하는 늦은 밤에 거리를 걸으며 읊조리던 <님의 침묵>은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게 했고, 견디기 힘든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되뇌던 <서시>는 연약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했다.
시를 더 외우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 옆에 밀착해 있는 스마트 기기들에 약간의 손길만 주어도 원하는 시를 감상할 수 있고, 나보다 더 감미로운 목소리로 낭송하는 시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시를 왼다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니다.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국어 시험을 봐야 할 일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오늘처럼 다른 어느 날엔가 또다시 <님의 침묵>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님의 침묵>을 낭송하시던 그 소리가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커버 이미지: 에드워드 호퍼, <Portrait of Orle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