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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문 May 18. 2020

내게 이름을 남겨준

태어나보니 세례를 받았다. 이름과 똑같은 세례명이 생겼다. 나의 이름은 '석문'이고 세례명도 '석문'이다. 외국 성인의 이름을 딴 대부분의 세례명과는 다르게 한국 순교 성인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그 때문에 매번 사람들에게 세례명의 유래에 관한 설명을 되풀이해야 했고 번거로웠다. 그럴 리 없다며 믿으려 하지 않 사람도 있었. 그래서 굳이 '석문'이라는 세례명 뒤에 '가롤로'라는 외국 성인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 세례명을 믿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게 톨릭 신자로 삶을 시작했다. 조부모님을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성당은 내게 그저 놀이터였고 토요일마다 열리는 주일학교보다는 오후의 프로야구 중계가 더 좋았다.


사람들의 북적거림에 지쳐가던 시기였다. 성당이 부대 안에 있었고 아무도 없을 만한 시간에 혼자 가곤 했다. 그리고 피아노가 있었다. 햇빛은 오색의 빛깔로 변모해 성당 에 눈부시게 내리쳤고 서로 어우러져 마치 빛의 안개가 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작은 소리도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곤 했기에 피아노 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무엇보다 고요했다. 침묵의 그 순간, 오직 내 곁에는 빛과 피아노 소리만이 있었다. 차가운 유리 같던 건반은 포근했고 그 위에서 서투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때때로 유려해 보이기도 했다. 놀이터로 삼아 놀던 공간은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주었다. 


지금은 오후의 프로야구도 좋아하지 않고 그 이후로 더는 성당을 가지도 않다. 어쩌다 여행 중에 들른 성당 안에서 내게 잠시나마 여유를 내어줬던 지난 기억 속의 그곳을 떠올렸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의 반짝거림도 고요한 침묵의 공기도 그때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다시는 그 안온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신을 믿지 않지만, 때때로 내게 이름을 남겨준 그 옛날의 순교 성인을 생각해 본다.



커버 이미지: 에드워드 호퍼, <주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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