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4년여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 대학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났다. 대학시절부터 모은 곗돈으로 우리는 각종 경조사를 챙겨왔는데 곗돈이 제법 모여 여행 한번 가자는 얘기가 나왔고 일본, 홍콩,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여러 후보 중 대만이 선택됐다. 당시 곧 초등 입학을 앞둔 첫째와 돌쟁이 둘째 키우느라 정신없었던 나는 친구들의 배려 덕분에 행선지가 대만이라는 것만 알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 나섰다. 돌쟁이를 종일 끼고 살던 나에게 주어진 2박3일의 짧은 자유시간! 행선지가 어디가 됐든 신나지 않을 수 있겠나? 앳된 스무살 소녀들은 어느새 40대에 접어든 아줌마들이 되어 타이베이로 떠났다.
가족여행에서 늘 일정짜기와 항공편, 숙소, 투어를 비롯한 모든 예약과 환전, 필요한 물품구매, 짐싸기, 맛집 알아보기, 아이들 컨디션 관리까지 준비는 오롯이 내 차지였고 파워 J인 나는 출발도 하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섭렵하고 결정을 내리느라 피곤하고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심사숙고한 일정에 만족을 못하면 또 그게 다 내 탓인 것 같은 투머치한 책임감, 이렇게 열심히 계획을 세웠는데 성의도 몰라주는 일행에 대한 서운함, 그 모든 것이 여행이 좋으면서도 싫은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각 가정의 베테랑 여행준비 담당자인 친구들이 일정을 정하고 항공, 호텔, 식당, 픽업택시, 투어, 관광지 입장권, 마사지, 포켓 와이파이까지 모두 예약해둬서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정말 편하게 재밌게 다녀왔다. 아주 만족스럽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들이라 척하면 척! 취향저격 맞춤 패키지를 준비해온 내 사랑스런 친구들! 일정도 야무지게 잘 짰고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꿔도 다 좋았다. 사전 정보 없이 떠나는 여행도 굉장히 즐겁다는 걸 깨닫는 여행이기도 했다. 아는게 병, 모르는게 약이라고 정보가 너무 많아도 피곤하다. 짧은 일정에 이것도 하고 싶고 저기도 가고 싶고 요것도 먹고 싶고... 하지만 모르고 따라가면 모든게 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패키지의 묘미가 이런 것일까? 나 패키지 좋아했네! 내 옷가지만 단촐하게 싸서 떠난 여행이라 발걸음이 날아갈 듯 했다. 남편은 육아에 쩔어있던 마누라가 간만에 여행간다고 딸내미 수학여행 보내는 아빠마냥 겨우 2박 3일 놀러가는데 캐리어도 새로 사주고 운동화도 두 켤레나 사주고 환전도 해줬다. 누가 준비해주는 여행이 이렇게나 편하고 좋은지 그제야 처음 알았다.
일과 육아에서 해방되어 여행길에 오른 나와 친구들은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 상점 골목에 줄줄이 매달린 홍등이 수놓은 지우펀의 야경, 소원을 빼곡히 쓴 붉은 천등을 좁은 철로에서 날리던 스펀의 해 질 녘, 먹거리와 볼거리들로 활기넘치는 야시장골목, 연말 일루미네이션 장식으로 반짝이는 도심의 쇼핑몰들과 그 한가운데 자리한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타이베이 101을 배경으로 이십여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대학로, 홍대, 신촌거리를 몰려다니던 설레는 스무살이 되어 깔깔거리며 웃고 재잘되고 있었다. 야시장에서 산 음식의 낯선 맛과 향에 일그러진 서로의 얼굴에도 웃음이 터져나왔던 우리였다. 한 때는 배낭 하나 메고 유럽, 홍콩, 일본, 동남아를 같이 누비던 우리였지만 아이들 키우느라 밤 외출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아줌마들에게 2박 3일의 짧은 자유는 가뭄의 단비였다.
짧은 여행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여행지의 단면은 내 머릿 속에 그곳에 대한 이미지로 영원히 박제된다. 내게 처음 만난 타이베이는 도파민이 분비되는 짜릿한 자유, 화려한 도시의 맛과 설렘으로 남았다.
푸통푸통 타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