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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May 17. 2024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밤톨아 안녕~

    "고사난자네요."

의사선생님의 처분만 기다리던 나에게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던 의사선생님이 건넨 말이다. 

".......고사난자요? 그게 뭔데요?"

"아기집은 커지고 있는데 난황(임신 극초기에 아기 배아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곳)도 없고 아기도 없죠? 쉽게 말하면 빈 집이에요. 빨리 수술해야 합니다."

"네?????"


    이 무슨 예상치 못한 전개인가. 난 오늘 아기 심장소리를 들으러 왔는데..... 사실 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고사난자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임신 6주차가 되도록 의사선생님은 임신이긴 한데 아기집이 모양이 좋지않다고 지켜봐야겠다며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지나면 아기집도 자리잡고 난황도 생겼을거라는 희망을 갖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쩌면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없을 거라는걸 직감하고 있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다. 멍해져있는 나와 남편에게 의사선생님은 고사난자는 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데 생각보다 흔하게 있는 일이고 수술한 뒤 몸을 회복해서 다시 임신을 시도하면 된다고 했다.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였는지 의사선생님은 받아들이기 힘들면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집으로 돌아와 남편은 거실에서 나는 방에서 종일 아무 없이 하루를 보냈다. 



     결혼 1년차에는 임신을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도 아니라서 생기면 바로 낳을 생각이었는데 2년차에 들어서자 조금씩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도 곧 생기겠지 하며 주말마다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니며 즐거운 신혼을 보내고 있던 어느 가을 주말, 설악산으로 가던 차 안에서 왠지 임신을 한 것 같다는 촉이 왔다. 남편은 테스트기는 했는지 생리주기가 지났는지 물었는데 난 아직 생리날짜도 멀었고 아무 근거는 없지만 임신이 확실하다고 했다. "상상임신 그런거 아냐? 아기에 집착하지 마. 난 아기 없이 우리 둘이 살아도 괜찮아."라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생리예정일이 지나도 생리를 하지 않자 나는 확신을 가졌고 바로 임신테스트기를 해보니 역시나 선명한 두줄! 임신이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임신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을 기대하며 병원으로 바로 달려갔지만 초음파를 본 의사는 여기 점처럼 보이는게 아기집으로 보이긴 한데  3주쯤 뒤에 오면 심장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 그때 임신확인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기다렸던 아이였기에  가족, 친구, 지인 모두에게 임신사실을 알리고 들뜬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매일 산부인과로 달려가고 싶어 3주를 기다리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애타게 3주를 기다리고 간 병원에서 확실한 임신판정을 받지 못한 채 또 1주일이 흐른 후, 나를 기다린건 고사난자 판정이었다. 





    남편은 네 몸이 제일 중요하니 아이는 몸 회복하고 나중에 가져도 되고 없어도 된다고 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우리 애기를 이렇게 쉽게 포기할거야?"

괜히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인터넷을 폭풍검색했다.  착상이 늦으면 난황이 늦게 보일 수도 있다는 인터넷 글 하나만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나는 밤톨이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임신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밤톨이라는 태명까지 지었던 나였다.) 동네병원말고 큰 병원에 가봐야할 것 같아 며칠을 기다렸다가 산부인과로 유명한 차병원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초음파를 찍었지만 거기서도 같은 진단을 내리고 빨리 수술을 하라고 했다. 더 이상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고 결국 다니던 병원에 다시 가서 수술날짜를 잡았다.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유산소식부터 전해야했다.  병가사유에 유산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병가를 내고 조퇴해 수술하러 가던 날의 서러운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마취를 깨고보니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커튼이 쳐진 베드에서는 분만을 앞두고 진통을 하는 산모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은 아기를 품에 안을텐데 나만 아기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초라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회복실에 누워있다가 집에 오니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놓고 계셨다.  걱정하실까봐 엄마에겐 수술 다 끝나고 회복하면 말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얘기를 했는지 엄마는 오밤중에 기차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누구보다 손주를 기다리며 빨리 아기 가지라고 재촉하엄마였지만 아기가 건강하지 않아서 엄마 힘들까봐 떠난 거라고 잘 먹고 잘 쉬고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셨다. 남편과 엄마의 위로에도 아기가 잘못된 것이 모두 탓인 것만 같아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야근을 많이 해서 그랬을까?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걸까? 콩나물시루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끼어서 매일 출퇴근하느라 그렇게 됐을까? 바쁜 출근길 뛰어다녀서 그랬을까? 일을 그만둘걸 그랬나? 내가 임신하자마자 동네방네 소문내고 설레발쳐서 아기가 도망간걸까? 한 달 전에 설악산 등산 가지말걸, 주말마다 놀러다니지 말고 몸조심할걸... 모든게 다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다. 

   수술을 받고 집에서 며칠 쉬다가 다시 출근했상황을 아는 동료들은 안타까워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는데 그게 괴로웠다. 차라리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해주었으면 했다.  남편과 나는 둘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공개적으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해본다.  초기유산은 흔한 일이라지만 흔한 일이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건 절대 아니다.  유산을 여러번 하고 뱃속에서 한참 큰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내가 겪은 고통은 새발의 피 같겠지만 누구나 제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다. 그렇게 첫 아이를 보내고 3개월만에 다시 아이가 생겼다.  밤톨이를 보낸 트라우마 때문에 임신 5개월이 지나 배가 불러올 즘에서야 임밍아웃을 할 수 있었다. 5살 터울로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지낸 덕에 밤톨이를 거의 잊고 지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 지켜주지 못한 나의 첫 아이 밤톨이가 항상 생각난다. 사실 글도 지난 가을, 밤톨이가 떠난 11월 무렵에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차마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이제서야 이어서 쓰고 있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고사난자는 아기집만 있을 뿐 태아는 생기지도 않은 것이니 아기를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기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게 정확하지만 난 밤톨이가 지켜준 덕분에 건강한 두 아이를 얻었다고 믿고 있다. 누가 들으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밤톨아~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  엄마는 널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엄마에게 건강한 두 동생들을 보내줘서 너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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