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게임산업 관련 컨설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게임의 경품으로 나오는 상품권의 투명한 사용을 위한 법적, 제도적, 기술적 마스터플랜을 구상하는 3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였는데, 당시 마감 한 달을 앞두고 갑자기 경품용 상품권이 전면 폐지되는 바람에 팀 전원이 멘붕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발주처에서도 대략 난감했는지 결론 없는 회의를 수차례 번복하더니, 결국 사업명에서 '상품권'을 아예 빼버리고 전반적인 미래 모형 설계로 두루뭉술하게 마무리지었었다.
컨설턴트가 아닌 엔지니어로서 참여한 나의 첫 번째 컨설팅 프로젝트는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어차피 게임 알못이라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케이드 게임이란 신세계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고, 다른 부서의 새로운 인연들도 만났으며, 덕분에 전공 분야의 또 다른 컨설팅 프로젝트에 스카우트되기도 했었다. 그때는 어리바리해서 3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는데, 일처리를 영 흐리멍덩하게 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 나를 잊지 않고 다시 불러준 걸 보면. (전공자가 전무후무해서 어쩔 수 없이 불렀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긴 했지만.)
도박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게임에는 관심도 없던 내가 프로젝트를 하는 내내 생각했던 화두는 바로 도박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게임이 도박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사업의 범위가 아케이드 게임인 만큼 그 대표적 사례로 대한민국의 강원랜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선 카지노'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당시 폐광지역의 관광산업 육성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사행성이 판을 치는 '합법적인 도박장'으로 변질되고 있었기에. 뿐만 아니라 '바다이야기'의 비리와 파문은 이미 이 바닥의 전설이 된 지 오래였으므로, 아케이드 게임이라면 그저 천박한 도박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물망에 오른 미국의 애틀랜틱시티와 일본의 동경 사례를 조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선진국의 게임산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법제도뿐만 아니라 디지털 환경 하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인기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OSMU(One-source Multi-use) 전략으로 '도박'이 아닌 그야말로 다양한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문화산업'으로 패러다임을 탈바꿈시켜 놓았다. 이는 도박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해주었다. 바로 환경에 따라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게임에는 관심 없지만)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미국의 대표적인 유흥 도시 라스베이거스가 궁금해졌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실패나 실연을 극복하기 위한 일탈의 장소로 자주 나오지만,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 보면 거기에는 도박 말고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도대체 연간 방문객이 무려 '4천만'에 육박한다는 라이베이거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디언의 거주지였던 황량한 사막 지대가 이토록 화려하게 변신하기까지는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 경제공황이라고 하면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보다 훨씬 전에 후버 대통령의 '후버댐 건설'이라는 또 하나의 굵직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후버댐 사업은 중서부 일대를 가로지르는 콜로라도 강의 수량을 조절하여 인근에 있는 사막지역으로 물을 공급하면서 동시에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일 끝나고 쉴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금방 도망가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직원들을 위한 복지 차원으로 카지노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라스베이거스의 기원이다.
후버댐 건설과 함께 도박이 합법화되자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사업은 본격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1940년대에 벅시 시걸이라는 마피아가 호텔 안에 카지노를 들여오면서 '카지노형 호텔'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는 사업가 하워드 휴즈의 투자로 이 일대의 호텔은 더욱 '고급화'되어갔다. 그리고 1980년대에 윈 리조트 그룹의 창업자인 스티브 윈이 '테마형 호텔'을 짓기 시작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가족 단위의 모든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입장료가 없는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각 나라별 특징에 맞게 꾸며진 호텔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중간중간 마주치는 갤러리와 유리 공예품을 보는 맛도 색다르다. 길거리에서는 시간대별로 물쇼와 불쇼가 펼쳐지고, M&M'S 초코볼과 코카콜라 매장에서는 경제 대국의 브랜딩 노하우도 엿볼 수 있다. 밤의 네온사인이 만들어낸 컬러풀한 야경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도박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즐길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카지노는 분명 중요한 수입원이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이 다른 도시보다 저렴한 이유도 카지노의 수익을 고려해서 책정하였기에 가능한 가격대일 것이다. (심지어 이 지역은 택스도 저렴한데, 이는 강원랜드의 물가가 터무니없이 비싼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카지노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그 결과 유흥과 환락의 도시는 밝은 이미지의 관광도시로 재탄생될 수 있었다. 카지노는 이제 라스베이거스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중요한 것은 즐기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자가 경쟁하지도 않는다. 도박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마인드도 이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