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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Sep 20. 2020

코리아타운과 독립운동의 자취

아메리카 기행 - 로스앤젤레스 2

미국 제1의 이민사회는 뉴욕이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로스앤젤레스가 훨씬 더 다양한 이민족 커뮤니티를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주치는 차이나타운부터 미국 3대 재팬타운으로 꼽히는 리틀 도쿄,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 문화권에 이르기까지 내가 돌아다니며 본 것만 해도 수십 군데는 족히 넘으니. (실제 구글에서 'ethnic enclaves in Los Angeles'로 검색하면 위키백과의 어마어마한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민 사회의 중심에 바로 코리아타운이 있다.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한국어 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거기가 바로 코리아타운이다. 특별히 한국적인 건축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로의 교차로마다 '코리아타운'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있고, 횡단보도에는 한국의 전통문양도 그려져 있다. 코리아타운이라고 해서 한국인만 사는 게 아니라 남미, 방글라데시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있지만, 산업의 대부분은 한인이 잠식하고 있는지 웬만한 랜드마크 건물에는 한국어 간판이 붙어 있다.


한인들의 미국 이민 역사는 일제강점기 이전의 대한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조선의 일본 개항 이후로 열강들이 앞다퉈 조선과 수교를 맺기 시작하는데,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900년대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본격적으로 이민 노동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심에 바로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색의 멋진 벽돌 건물이 어우러진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가 나온다. 아이비리그는 아니지만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대학인 이곳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기거했던 가옥이 있다.


그에 대해서는 중국의 임시정부 편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조선인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이 캘리포니아 주의 오렌지 농장이었다고 한다. 도산 역시 농장에서 일하며 독립자금을 모으는 동시에 학업을 병행했는데, 농장에서 만난 교포들의 무지함을 접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의 교육 이념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고 하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요.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하는 것이오?

- 오경준의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 중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을 갖춰라... 읽을 때마다 뜨끔하게 만드는 도산의 어록을 되새기며 '도산 안창호 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에는 사진 몇 장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고, 내부 공간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는 이 점이 또한 쇼킹했는데, 기존의 기념관처럼 그저 과거의 흔적을 보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후학 양성을 위해 계속해서 지식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공간에도 그의 교육 이념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그는 또한 해외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한인 커뮤니티를 통합하기 위해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하였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건물은 1938년에 샌프란시스코의 Bay Bridge 공사로 이전해 온 것이다. 주권이 없던 시절 미국으로 들어오는 조선인을 일본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고, 멕시코와 쿠바 등 미주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중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대한인국민회는 그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1인도 없음을 볼 때 가슴이 답답하다.


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노동과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도산의 말씀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단순하지만 명쾌란 진리로 동포들을 다독이며 캘리포니아의 열악한 농장 생활 속에서 모금한 액수가 무려 30,600달러. 이는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5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관련 자료). 과연 진정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위에서 소비만 하는 위정자들인지, 아래에서 묵묵히 일하는 백성들인지 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어록은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도산의 이민사회 정착에 기여한 업적과 한인들의 미국 경제에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2004년 6월 (로스앤젤레스 시가 아니라 무려) 미 연방의회에서 코리아타운에 있는 우체국의 이름을 'Dosan Ahn Chang Ho'로 명명하였다. 비록 지금은 우체국 업무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지만,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의 명칭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이 미국 한인사회의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간판과 낡은 건물에서 발전이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당신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도산의 남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일깨웠던 계몽정신과 식민지 시절의 역경을 딛고 경제를 일궈내서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던 민초들의 얼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당신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래도 뿌리인 조국을 잊지는 말라.

- 도산이 장녀 안수산에게 남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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