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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Oct 20. 2020

다운타운의 무법자들

아메리카 기행 - 샌프란시스코 4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중심은 보통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에서 시작된다. 미국에는 '유니언'이란 이름의 광장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샌프란의 이 광장이 특별한 이유는 여행의 모든 것을 여기서 시작했고 마무리했던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광장이라기엔 좀 아담한 사이즈지만, 그 안에는 작은 야외 테이블이 놓인 카페도 있고, 가끔 이름 모를 작가들의 무료 전시회도 열리며, 주위에는 백화점을 비롯한 명품샵과 호텔이 몰려 있어 사뭇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이 여유롭고 럭셔리한 곳이 알고 보면 전쟁의 역사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또한 흥미롭다. 광장 이름인 '유니언'은 남북전쟁(1861~5) 당시 북부 연합군(Union Army)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린 데서 유래하였으며, 광장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기둥은 1898년에 쿠바에서 일어난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 당시, 쿠바를 지원했던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전승탑이다.

이토록 비장한 역사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광장의 네 모퉁이에는 로맨틱한 하트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 아기자기한 조형물은 Tony Bennett의 끈적끈적한 재즈곡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스콧 맥켄지의 '샌프란시스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런 밝고 화사한 노래가 더 잘 어울릴 줄 알았더니 토니 베넷의 한없이 늘어지는 재즈곡도 의외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이 하트 조형물은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 재단(San Francisco General Hospital Foundation)에서 주관하는 복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매년 다양한 디자인을 공모하여 도시 곳곳에 전시했다가 10월에 경매로 넘기는데, 거기서 발생한 수익금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의료지원금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한 곡의 잔잔한 노래가 그 도시를 대표하게 되고, 이것이 영감이 되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로 발전하다니 이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노래를 직접 부른 토니 베넷도 저 하트를 볼 때마다 뿌듯해할 것 같다.

유니언 스퀘어가 명품샵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 아래쪽에는 백화점과 아웃렛, 대형마트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쇼핑몰 몰려 있는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가 나온다. 이 일대는 버스부터 지하철, 공항철도까지 집결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보통 다운타운이라고 하면 시청이나 박물관이 있는 시빅 센터가 아닌 유니언 스퀘어를 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시빅 센터는 어디일까? 바로 유니언 스퀘어에서 대각선으로 뻗은 마켓 스트리트를 따라 서쪽으로 10블록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중간에 그 이름도 달콤한 텐더로인(Tenderloin)이 있다. 하지만 소고기 중에서도 가장 비싼 부위인 '안심'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로스앤젤레스의 홈리스 편에서 언급했던 노숙자들의 천국 '스키드로(Skid Row)'에 해당되는 곳인데, 어찌하여 이런 위험한 곳에 가장 럭셔리란 식자재의 이름이 붙은 것일까?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던 이곳은 경찰들도 피해 갈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위험하다기보다 혐오스럽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도시에 똥 지도라는 게 따로 있을 정도이니. 아무튼, 당시 경찰들은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위험수당을 추가로 받았는데, 그 덕분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싼 텐더로인을 사간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유니언 스퀘어에서 텐더로인을 지나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제2 다운타운이라 할 수 있는 시빅 센터가 나온다. 휘황찬란한 시청과 오페라하우스, 각종 박물관에 공공도서관까지 있지만, 여기저기 널브러진 '다운타운의 무법자들' 때문에 결코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은 곳이었다. 사실 그들로부터 딱히 위협이나 공격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일단 시각적으로 불쾌하고 냄새 또한 참을 수 없이 역해서 스쳐지나가는 것마저 힘들었기에. 덧붙이자면, 대도시에서 도서관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곳은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 수는 미국에서 투 톱을 달리고 있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비하면 1/10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로 말하자면 제일 혐오스러웠던 로스앤젤레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는데, 이 두 도시는 같은 캘리포니아 주에 있어서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 편에서 노숙자 발생의 주원인으로 임대료 상승을 꼽았는데, 실리콘밸리 등 고급 일자리가 많은 샌프란시스코는 고액의 연봉자도 임대료에 허덕이는 기현상이 발생할 정도로 임대료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관련 기사).


미국에는 전세의 개념이 없고 자가 아니면 월세인데, 금수저가 아닌 이상 자가는 힘들 것이고, 임대료가 수입을 좀먹는다면 저축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실직이라도 하게 된다면? 직업이 있더라도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거리로 나앉게 되는 건 순식간이다. 이런 현상이 2020년도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관련 기사).


노숙자(Homeless)지만 희망이 없는 것(Hopeless)은 아니다.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실제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숙자로 살았던 자산가 크리스 가드너의 고난 극복기를 다루고 있어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와닿는 영화이다. 실적 없는 외판원이 월세방에서 쫓겨나 지하철 화장실을 전전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그럼에도 그의 성공이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 주식 중개인이라는 '희망'을 향해 딱 죽기 직전까지의 '노오력'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텐더로인을 배회하고 있는 저들도 처음부터 노숙자로 시작하지는 않았을 테고, 한때는 희망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지자체에서는 그들을 위한 쉘터를 짓고, 취업 훈련을 제공하는 등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보금자리를 제공해 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며, 취업을 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줘야 삶의 방향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나는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지금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삶이다.

- 크리스 가드너의 <늦었다고 생각할 때 해야할 42가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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