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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Oct 26. 2020

골드러시와 서부 도시의 성장

아메리카 기행 - 시애틀 1

아메리카 대륙에는 3번의 유명한 골드러시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떠돌았던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 전설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콜롬비아에 위치한 구아타비타 호수 일대에는 칩차(Chibcha)라는 부족이 살았는데, 그 추장은 중요한 의식 때마다 온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호수에 들어가 씻어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보물을 호수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전설은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금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항해 시대가 끝난 후 뒤늦게서야 칩차족의 의식을 표현한 금 조형물이 대량 발견되면서 고스란히 콜롬비아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골드러시 사건이다.


그 후 다시 시간이 흘러 19세기 중반,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번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848년,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 강 유역에 있는 한 제재소에서 일하던 목수가 부지 내에서 금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매체가 전무했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기까지는 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이듬해인 1849년부터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당시의 연도를 따서 이들을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고 불렀다.

새크라멘토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주 일대에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금을 운반하고 현금을 유통하는 사업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일찌감치 캐치한 헨리 웰스와 윌리엄 파고는 각자의 성을 따서 웰스파고 은행(Wells Fargo & CO., 줄여서 WFC)을 설립했다. 그 본사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금융가(Financial District)에 있으며, 통유리로 고급스럽게 지어진 건물 1층과 2층에는 골드러시 시절에 현금을 운반했던 마차와 저울, 장부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조그만 시골마을이었고, 법보다 힘의 원리가 작용하던 무식한 시절이어서 금을 차지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털어가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시정부에서는 도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알카트라즈 섬에 군사 기지를 세우고, 법률을 정비하였으며, 물자를 운송하는 데 필요한 기반 시설을 구축해나갔다. 일개 어촌에 불과했던 샌프란시스코가 차츰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 골드러시를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포티나이너들로 인해 금은 점점 고갈되어갔고, 1849년에 시작된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는 불과 5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53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대륙으로 건너온 사람의 대다수가 모험심이 강한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은 골드러시가 끝나고 나서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그대로 남아 다른 일거리를 찾아 전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47년이나 흐른 뒤, 다시 한번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1896년 캐나다 북서부 유콘 주의 클론다이크(Klondike) 지역에서 낚시를 하던 세 사람이 강에서 금을 발견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진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시애틀에서는 약 1,500명이 북쪽으로 몰려들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북부로 가는 배표가 매진되어 암시장에서 천 달러에 배표가 거래되기도 했다. 특히 시애틀은 캐나다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어서 자연스럽게 숙박, 교통, 식료품 등 여행 관련 산업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골드러시가 막 시작된 1896~7년 사이 시애틀 시의 수입은 기존의 3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시애틀의 파이어니어 광장 근처에는 골드러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클론다이크 박물관이 있다. 내부에는 그때 그 시절 성행했던 시애틀의 산업 현황과 금광을 캐러 가는 사람들에게 지원된 물품, 그리고 주요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바로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창시자 John Nordstrom이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당시 그는 16세의 나이로 단돈 5달러를 들고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렸던 그에게 노다지의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이 고갈된 후에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 노가다판을 전전했는데, 그러다 시애틀에서 2번째 금광이 터졌단 소식이 들리자 캘리포니아 시절과 달리 이제는 노련한 나이가 된 노드스트롬은 채굴팀에 합류하여 2년 만에 금광을 발견하면서 13,000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이게 된다.


그 후 시애틀로 다시 돌아온 그는 친구 칼 월린과 'Wallin & Nordstrom'이라는 구두 가게를 차렸는데, 이것이 바로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전신이다. 노드스트롬이란 이름에서 북유럽 브랜드인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시애틀이 원조인 미국 브랜드이며, 동시에 골드러시의 역사와 함께 탄생된 유서 깊은 백화점인 셈이다. 덧붙이자면, 리바이스 청바지 역시 골드러시의 붐을 타고 생겨난 브랜드인데, 잘 찢어지지 않는 작업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당시 팔고 있던 천막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이 청바지라고 한다.


골드러시는 비록 황금에 대한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체되어 있던 미서부의 여러 낙후된 마을들이 신흥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었다. 웰스파고 은행의 설립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은 바로 에너지의 이동이다. 그 에너지가 지나간 자리에는 문화가 꽃 피어난다. 과거 실크로드가 그랬듯이,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도 그 바람을 타고 그들만의 도시 문화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역사는 성장통인 것 같다. 당시엔 흑역사로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한 단계 성장해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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