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내 여행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일부러 찾아가는 타입이었던가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한정된 공간에서 누군가의 기준에 의해 전시해놓은 것을 보는 행위는 어딘가 밋밋하고 수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례로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꽤 지루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은 너무 넓고 유명한 작품들이 차고 넘쳐서 마치 예술 작품을 쌓아놓은 아웃렛 같았다. 그 방대한 양을 한정된 시간 내에 소화시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물며 비전공자인 나는 어떻겠나.
우연히도 첫 여행지가 유럽이었던 까닭에 세계 3대 박물관이 있는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질리도록 살롱 문화를 경험했고, 그때마다 유명하다는 작품들을 과식했으며, 그 결과 나는 예술 체증에 걸려버렸다. 전시문화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때 미처 소화시키지 못했던 시간들이 불러온 부작용이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턴 정말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과감하게 패스하는 여행을 했다. 브런치에 올렸던 여행기 중 인도와 중국 편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에피소드가 전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예 안 갔던 건 아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의미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만큼은 그게 조절이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입장료가 무료인 곳도 많았고(낯선 곳에서 공짜의 유혹만큼 뿌리치기 힘든 것도 없는 듯), 시간이 흐르면서 내 취향도 점점 진화되어 보고 싶은 것도 많아진 까닭이다. 나는 그런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레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예술이라는 게 꼭 뭔가 알아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저 둘러보다가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으면 그때 멈춰 서서 좀 더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재능을 타고났는데, 어찌 예술을 보는 눈이 같을 수 있겠나. 그러고 보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보는 자의 몫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시애틀 아트 뮤지엄(Seattle Art Museum, 줄여서 SAM) 앞에 있는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뭔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조형물은 미국의 설치 조각가인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가 만든 것으로, 망치를 들고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통해 '노동의 숭고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 이미지에 비하면 한참 올드한 버전이지만, 홀로 쓸쓸히 일하는 거인의 모습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대표 정서인 '고독함'은 그 어느 작품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예술의 모든 것은 자화상이다.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보면 항상 '인간'이 중심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삶이 예술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걸리버 여행기>에나 나올 법한 거인의 형상일까. 거기에는 작가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친절한 거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의로운 거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크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것이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한 번쯤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자각의 메시지라도 보내려는 것일까. 해머링 맨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므로.
사회는 점점 고도화되어 가는데 노동은 점점 이분법으로 단순해져 가는 느낌이다.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과 자기 일을 하는 사람. 후자를 요즘 말로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또는 체인지 메이커라고도 한다. 꼭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활동해야만 크리에이터가 아니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어찌 보면 '라떼' 세대보다 투명한 능력 위주의 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지만, 노동이란 게 그리 쉬운 거였다면 애초에 '노동'이라는 이름이 붙었겠나 싶다.
고대의 4대 문명 발상이 일어난 이후 노동의 형태는 숱하게 변해왔다. 땅에서, 바다에서 하던 노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제는 클라우드라는 공간으로 승천(?)하고 있다. 바야흐로 손발이 아닌 손가락이 가장 바쁜 세상이다. 망치를 두드리는 해머링 맨 앞에 서 있으니 더 격세지감을 느끼며 노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에 스타트업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 중의 하나라면
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유튜브 채널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멤버십 커뮤니티인 '헤이조이스'의 대표 이나리 님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대기업의 주요 인사직을 거쳐 온 엘리트에게도 열등감에 싸인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일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분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정직원 이상으로 열심히 임했고, 정직원으로 일하면서도 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살면서 과연 한 가지 일만 할 것인가... 그러다가 일하는 여성으로서 20~30년 전부터 했던 고민이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것을 보고 헤이조이스를 창업했다고 한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트업이라니, 이보다 더 명쾌한 명분이 어디 있을까. 같은 노동이지만 끊임없이 주변을 돌아보며 탐구했던 그분에게서 노동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조금은 얻은 것 같다.
나의 일과 삶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안 들거나 나답게 살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을 계속해보시길.
우리 모두는 죽는 그 순간까지 성장할 수 있으므로.
- 헤이조이스 이나리 대표의 '세바시' 강연 중 (관련 영상)
해머링 맨과 노동의 의미에 꽂혀서 생략할 뻔했는데, SAM의 전시는 꽤 볼 만했다. 20달러라는 입장료가 있지만, 기존의 미술관에서 보지 못한 독특한 스타일의 전시를 만나볼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들러보기를 권한다. 덧붙이자면, 고전보다는 현대미술의 비중이 커서 개인적으로는 더 반가운 곳이었는데, 현대미술은 그 난해함의 끝을 알 수는 없지만 내 방식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좋다.
만약 시애틀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미술관을 찾는다면 시애틀 대학 근처에 있는 프라이 미술 박물관(Frye Art Museum)을 추천한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시절, 정육 가공업으로 부를 쌓은 찰스 프라이 부부가 그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1952년에 문을 연 후 지금까지 철저하게 기업에게만 기부를 받고 일반인에게는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시대별 핫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특별전시관이다. 가끔 엽기적인 그림이나 사진이 나와서 놀라기도 하지만, 이 또한 여기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니 즐겨보시기 바란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우리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