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고래>를 읽고
언젠가부터 그녀는 아이뿐만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 그녀가 겪은 일들, 언젠가 눈앞을 스쳐간 풍경들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다음 나란히 늘어놓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보는 동안만큼은 고통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벽돌 위에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개망초와 뱀, 메뚜기와 잠자리, 고라니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에서부터 대장간의 모루, 벽돌을 실어 나르던 트럭 등 그녀의 인생을 스쳐간 온갖 물상들, 다방의 풍경과 평대역에서 날뛰던 점보의 모습 등 수많은 장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515p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눈앞엔 꿈인 듯 생시인 듯 코끼리 점보가 서 있었다. 그의 주변에선 여전히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왔으며 그의 몸뚱이는 빛에 가려져 그저 둥근 원형의 빛만 느껴질 뿐이었다. 점보는 그녀 앞에 다가와 어서 타라는 듯 등을 내밀었다. - 529p
점보는 계속 날아갔다.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곧 안드로메다 성운 근처 어디쯤을 날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 춘희와 점보의 몸은 투명해지는 동시에 빛이 떨어져 나가듯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서 설탕이 녹는 것과 같았다. 춘희가 놀라 물었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532~533p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23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