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기분 좋은 금요일 밤이었다. 삼겹살에 야채와 콩나물을 듬뿍 올려 볶아낸 매콤한 콩나물 불고기를 앞에 두고 남편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기 한 접시와 맥주 두 캔씩을 비우고 나니 속이 좀 더부룩하길래 잠깐 걷고 오려고 밖으로 나섰다. 코끝이 매울 정도로 추운 날이었지만 먹은 걸 조금이라도 더 소화시킬 생각으로 평소의 산책 코스보다 더 먼 거리로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통증, 알고 보니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지 못했던 평화로운 저녁
즉흥적이었던 그날의 결정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왼쪽 허벅지 바깥 부분이 당기더니 움직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일 년 전부터 왼쪽 다리에 조금씩 불편한 느낌은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어서 그냥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세한 움직임에도 극심한 통증이 생겨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니 덜컥 겁이 났다.
주말 이틀간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월요일 아침부터 병원을 찾았다. 원인은 대퇴골 힘줄에 생겼던 석회가 격한 움직임으로 녹으면서 생긴 통증이었다. 큰 병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의사가 '격통'이라 표현할 정도의 증상은 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무탈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살자고 늘 다짐하지만 사실은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 더 풍족해지고 싶은 욕심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적당한 집 한 채에 만족하고 노동 소득만 열심히 저축해 온 우리 부부와 달리 부동산 상승기에 과감한 대출을 통해 투자로 부를 일군 친구나 지인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축하해 주는 마음 한 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어리석게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자조와 상대적 박탈감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현재에 감사하며 살자고 되뇌어도 마음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다리로 걷고 뛸 수 있는 보통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머릿속을 채웠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통증 없이 잠자고 걷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 되었다.
이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유튜브 메인화면에 신체나이를 측정하는 추천 영상이 떠 있었다. 균형감각 테스트와 근력 테스트를 통해 신체나이를 알아본 결과 40-50대 지원자들의 몸 상태는 60대 또는 80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리가 아파서 근력 테스트는 할 수 없어서 한 발로 딛고 중심을 잡는 균형감각 테스트만 해봤는데 나 역시 60대인 것으로 나왔다.
몸으로 경험하니 다르게 들리는 말들
좋은 말을 아무리 귀가 닳도록 말해줘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그동안 주변에서 들어온 말들, 이를테면 '커피는 몸에 안 좋으니 끊어봐라', '골다공증이 올 수 있는 나이니 음식을 골고루 챙겨 먹어라', '근육을 지키기 위해 근력운동을 꾸준히 해라', '밤에 일찍 자라'와 같은 조언들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기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 왔으니.
'우울하니 이 정도의 커피와 달다구리는 먹어도 되잖아', '피곤하니 며칠은 운동을 건너뛰어도 괜찮겠지', '빵 좀 자주 먹는다고 큰 병이야 생기겠어?'와 같은 핑계들을 갖다 붙이며 몸을 돌보기보다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들에 기대어 왔다.
그런 모든 것들이 누적된 성적표가 바로 현재의 내 몸 상태인 거겠지. 그동안 큰 병치레를 한 적이 없어서 지나치게 건강을 과신해 온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몸의 나이가 더없이 정직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날의 콩나물 불고기
반갑지 않은 통증이지만 덕분에 그동안의 생활습관을 돌아보고 재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나쁜 일만도 아니라고 본다. 삶은 이렇게 한 번씩 우리를 흔들어 정신 차리게 한다.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것을 채워가는 것이기도 하다. 주관적 판단에 사로잡혔던 좁은 시야와 청력이 트이고 오지랖처럼 여겨지던 말들이 새로운 울림이 되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면.
그렇게 변화해갈 앞으로의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생이 계속 살아볼 만하다고 여겨지는 건, 바로 이번처럼 그 나이가 되어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