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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Jun 03. 2024

명절 차례 제끼고   여행 떠난 맏며느리

  설 연휴 마지막 날. 느긋하게 아점을 먹고 거실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옆에는 위층 남자가 버티고 앉아 행여 뺏길세라 손에 땀나게 리모컨을 틀어쥐고 있었다.

“어, 저기. 우리가 잤던 호텔인데.”

“봐라 봐라. 저기서 우리 사진 찍었던 거 기억나나?”


TV 화면엔 한 젊은이가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땅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랬다. 그곳은 거대한 소금사막 우유니였다. 세 젊은이의 남미 여행을 다루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의 우유니 편이었다. 다른 여행 프로그램과 달리 계획 없이 아무 곳이나 들러 먹고 싶은 것 먹고, 보고 싶은 것 보는 즉흥적인 여행으로 그래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셋은 우유니가 보여주는 하얀 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름 우유니였다. 흠, 난 약간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가 1월의 우유니를 봤냐?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 내 눈은 TV 화면에, 머릿속은 6년 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가혹했다. 나무 그늘 아래 띵가띵가 기타를 퉁기며 세월을 노래하는 베짱이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제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물고 쉴 새 없이 오가는 개미보다 분주한 나날이었다. 보충수업을 반강제로 하던 시기였고 학급 수가 적은 학교라 교사 수도 적었다. 세 과목에 교재 세 권. 1교시부터 6교시까지 6시간 수업이라니, 더구나 본관과 별관을 수시로 오가야 해서 쉬는 시간 10분도 이동시간 빼면 자리에 앉기는커녕 화장실 갈 시간조차 빠듯했다.


  하루 6시간 수업의 강행군은 며칠도 못 가 저질 체력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6교시가 되면 목소리는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몸뚱이는 출렁다리처럼 후들거렸다. 머리에 지퍼가 달렸다면 시원스레 열고 문제로 꽉 찬 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수업이 다가 아니었다. 교재가 3권이니 수업을 마친 후에는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공부해야 했다.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그래 참자. 참는 자에게 영광이 오리니 겨울방학엔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학교를 벗어나리라 생각했다.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여행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그렇게 여름을 견뎌내고 가을을 움켜쥐었다.

     

  그날도 가끔 들르는 여행사 홈페이지를 찾았다. 다양한 상품들이 모객을 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중남미 7개국을 30일 동안 여행하는 상품이었다. 심봉사가 눈을 뜬 기분이랄까. 앞도 뒤도 없이 가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 페루의 나스카라인, 악마의 목구멍 이구아수 폭포, 모레노 빙하, 신비로운 우유니 사막,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게다가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까지. 족집게 도사처럼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콕콕 집어 잘도 골라놨다. 구체적인 여행 일정을 살펴보는 나는 먹이를 보고 침 흘리는 야생의 짐승처럼 흥분했다.  

   

앗싸! 12월 31일 출발 상품이 있었다. 겨울방학이 12월 30일이었다. 쾌재를 부르며 탁상달력을 넘긴 순간 1월의 빨간 날들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 이럴까. 설, 설을 잊고 있었다. 나는 맏며느리다. 시어른들은 돌아가셨고 제사며 명절 차례를 우리 집에서 지냈다. 그때의 절망적인 기분이란 당첨된 로또 복권을 다시 뺏긴 기분이었다. 며칠을 끙끙댔다. 도저히 그냥 넘기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 당시는 방학이라 해도 한 달씩이나 되는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말이나 해볼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남편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가지, 뭐.” 믿기지 않았다. 크게 떠 봤자 자기 눈 크기 삼분의 일밖에 안 된다고 놀리는 실눈이지만 최대한 힘을 주고 부릅떠서 쳐다봤다. “다시 말해 봐. 방금 뭐라 그랬어?” 남편의 선선한 반응에 반신반의했다. 이 사람이 남미로 가서 나를 어쩌려는가? 내가 든 생명보험이 있었던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차례는 어쩌고?” “한 번쯤 건너뛴다고 설마 노하시겠어?” 결혼 후 25년을 일 년에 제사 두 번, 명절 차례 두 번을 지냈다. 시동생 식구들이 오니 우리 생각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말했다. 음력 11월 초 아버님 기제사가 있으니 그때 좀 더 정성껏 모시자고. 평소의 남편은 신중함이 지나쳐 짜증을 부르는 사람이었다. 안 된다고 해도 열 번은 졸라보리라 생각했다. 열 번 찍어서라도 넘어뜨리리라 굳게 마음먹었는데 이야기 꺼내자마자 오케이라니.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그 당시 내가 애정을 쏟는 대상 1위는 반려견 은비였다.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1위 자리를 잠시 그에게 넘기기로 했다.     

  

  우리가 택한 상품은 세미 배낭여행이었다. 패키지와 자유 여행의 중간이라지만 패키지 쪽으로 많이 기울었고 점심, 저녁 식사와 도시 시내 관광은 자유였다. 3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겪은 우여곡절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루에 이야깃거리 하나는 보통이었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없다. 사진이 전부다. 수년 전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메모만 잘해뒀어도 수십 편의 글로 우려먹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손가락을 원망하니 머리 탓이란다. 기억 세포들이 내게 명령을 내린다. 관광지 설명과 먹거리 사진은 인터넷에 넘쳐나니 어쭙잖게 남들 따라 쓰지 말고 그냥 네가 겪은 이야기나 쓰라고. 그래 볼 참이다. 가자, 그날의 기억 속으로. 그때만큼 떨리는 마음으로 한 달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우유니 소금사막
경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나스카 라인


모레노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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