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은 설렘을 동반한다. 여행 기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여행이 결정되는 순간 행복 지수가 올라가면서 여행 짐을 꾸릴 때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다. 그리고 공항에 들어서면 풍선처럼 부풀어 ‘팡’하고 1차 폭발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엔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저질 체력은 둘째치고 일단 짐이 장난 아니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도 있지만 열대지방부터 칠레의 남단으로 빙하를 보러 가려면 사계절 옷을 다 챙겨야 했다. 게다가 세미 배낭여행이라 약간의 먹거리와 세면도구도 필요했다.
남편은 꾸려놓은 가방을 보고 질겁을 했지만 더 이상 뺄 물건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여행 내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챙기지 못해 후회했다. 패키지여행만 다니다 보니 노하우가 부족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다음 해 역시 세미 배낭여행으로 아프리카 한 달 여행을 예약하고는 건조 국, 김치 캔, 누룽지, 일명 전투식량이라 불리는 비빔밥 등을 잔뜩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몸이 아파 여행을 포기했고 예약금 수백만원을 날리고, 준비해 두었던 것들을 겨우 내내 집에서 여행 기분 내며 먹어 치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참, 여행의 고수님들께서는 다 아시겠지만 외국 호텔 중에는 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 많다. 더구나 겨울이 아니고서는. 나같이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따뜻함이 그립다. 그래서 겨울에 여행을 가거나 현지 기온을 보고 쌀쌀할 것 같으면 접이식 전기요를 준비하면 만족도가 매우 높다.
자. 이제 출발, 내가 사는 곳은 울산이다. 동남아시아나 중국, 일본은 김해공항에서 출발하지만 그 외의 여행지는 인천으로 가야 한다. 30인치와 24인치 가방 하나씩 그리고 각자 백팩을 업고 집을 나섰다. 경로는 간단하다. 택시를 타고 KTX역으로 가 예매해 둔 기차를 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탑승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환승. 페루행 비행기를 타고 리마에 도착. 집에서부터 38시간이 걸렸다. 장장 38시간. 장장(長長)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맞는 말이다. 리마에 도착한 우리 부부는 이미 흐물흐물 시어 터진 파김치 꼴이었다.
하지정맥류가 있는 내게 장거리 비행은 쉽지 않다. 그래서 통로 쪽 좌석을 원한다. 다리를 뻗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실함 때문에 한 나이라도 젊을 때 멀고 힘든 곳부터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남미 여행을 고집했다. ‘굳이 왜?’라고 묻지 말 것. 산을 찾는 사람이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마찬가지다. 직업상 모범적으로 살아야 하는 내게 (사실 모범적으로 살지도 않으면서)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사소한 일탈을 (이를 테면 짧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니는)할 수 있는 세상으로의 통로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멕시코, 쿠바까지 일곱 개 나라를 다니다 보니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일이나 모든 기념일에 선물을 하지 않고 그 돈을 여행경비에 보태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헉’ 소리가 나올 만큼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두 눈 질끈 감고 다녀와서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길벗이라 불리는 30대 초반의 여자 가이드를 포함하여 한국에서 21명이 출발했고 미국에서 50대 부부가 합류하여 모두 23명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좋든 싫든 한 달 내내 일정을 함께 해야 하니 식사 겸 서로 간에 인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간단한 고기 종류와 피자, 샐러드, 맥주가 곁들여졌고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먼저 인사하신 분은 친구 사이인 남자 두 분으로 배우자와 함께 오셨는데 네 분 모두 일흔이 넘었다. 나도 저 나이에 장거리 여행이 가능할까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다. 그분들의 용기와 체력이 부러웠다. 그 외 부부 네 쌍, 혼자 오신 여성 다섯 분. 퇴직기념 여행을 오신 남자 분도 있었다. 초등 여학생과 아이 엄마 외에 50대부터 70대의구성원을 보니 쉽지 않은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여행지가 워낙 넓다 보니 새벽 4시 기상은 보통 있는 일이고 하루 서너 시간 버스 타는 건 기본이었다. 다행히 우리 여행은 버스로 10시간 이상 걸리는 곳은 비행기를 이용했다. 중남미 내에서만 10번의 비행기를 탔다. 내 친구 숙은 남미 5개국에 40일이 걸렸는데 비슷한 경로로 다녔지만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열흘 정도 더 걸린 셈이다. 여행팀의 연령대가 높은 이유가 있었다. 비용도 부담이 될 뿐 아니라 30일이나 걸리는 여행 일정도 직장 생활하는 사람에겐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식사가 시작되자 미국에서 합류한 부부(이하 L 씨 부부)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놀랍게도 겉절이였다. 그것도 테이블마다 한 접시씩 놓을 정도로 푸짐한 양에 먹음직스러운 비주얼, 일행 모두 찬사를 보냈다. 우리에게 깜짝 선물을 하기 위해 미국에서 출발 전 담근 김치라 했다. 먼 길 오느라 지친 우리에게 먹음직스러운 겉절이는 긴 여정의 고단함을 잊게 해 주었다.
남편과 L 씨의 나이가 같았고 그 아내는 나와 한 살 차이라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여행 내내 우리 부부는 L 씨 부부에게 먹거리 신세를 많이 졌다. 여행의 고수인 그들은 각종 밑반찬을 비롯해 새우젓, 황태와 기본양념을 가지고 다니며 느끼함에 질려하는 우리에게 매운맛을 보여줬고 우리 부부는 이역만리 먼 곳에서 미역 황태해장국과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인심 좋고 다정한 L 씨 부부를 비롯하여 유쾌한 김여사와 센스쟁이 효리네 덕분에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 내내 붙어 다녔던 한 달간의 인연은 여행 후 한동안 이어져 소식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