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속 시선
많은 자연물은 필요에 따라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식물부터 동물 모두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도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고 훼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나쁜 것일까? 학창 시절 배웠던 바른 생활, 도덕에 따르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니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차별되는 게 있다.
인간은 단순 생존을 초월해 단계별로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이라 칭한다. 인간은 생리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안전, 그 다음은 소속감과 애정, 그다음은 자존감, 이어서 자아실현, 마지막은 자아초월욕구라는 6단계로 구성돼 있다.
단계별 욕구를 채우는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양심이라는 혹은 이성이라는 초자아가 작용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이나 규범이라고 부른다.
케케묵은 개념이지만 물질만능주의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면서 인간의 양심과 이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한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또, ‘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민족이기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반증하는 것 중 하나가 인문학의 상실이다. 예전에는 문사철이라고 불렀던 인문학은 학문으로서 가치를 떠나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외면받는 시대로 도래했다.
인문학이 그나마 도덕과 규범의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기초이자 최후의 보루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기성세대가 된 어른들이 다음 세대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뇌와 몸은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글을 읽고, 토론하며, 고뇌하면서 사색에도 잠겨야 하는 인문학은 안 어울리는 세상이다. 정보는 영상으로, 손가락과 손바닥 안의 기기로 접하지만 무게감은 없어 보인다.
매체와 수단이 발달해도 기자는 현장에 가야 한다. 그래야 답을 찾고, 답이 아니더라도 현장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더불어, 과정을 알아야 드러난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자본이 군림하는 세상에서 무지한 이들의 신념이 지배하는 지금, 뜨거운 바다를 헤엄쳐 나온 해녀들의 뒷모습에서 나를 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