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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뜰살뜰 구구샘 Jun 20. 2024

우리 반 선생님은 항상 화를 내요

강원국 김민식, <말하기의 태도>

복도를 지나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야, 너희 반 담임쌤은 좋아 보인다! 우리 반 쌤은 항상 화를 내는데"


눈치가 빠르다면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그 우리 반 담임쌤이 바로 나였다. 물론 그 학생은 내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아니, 몰랐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내 멘탈을 챙길 수 있었으니까.


'내가 맨날 화냈었나?'


남 탓은 죄악이다. 담임이 맨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게 그거다. 다른 사람 탓하지 말라고. 그런데 교사가 학생 탓을 해서 되겠는가. 그런데 일단 팩트체크부터 해보자. 내가 정말로 매일 화를 냈었나?


그 학생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꾀를 냈다. 학년 말에 익명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이다. 종업식 전날 1년 간 같이 지내본 담임쌤의 장점과 단점을 쓰라고 했다. 진심을 담아서.


학생들이 솔직하게 적었냐고? 솔직을 넘어서 팩트로 그냥 후려갈겼다. 글씨체로 누가 적었는지 다 아는 거 아니냐고? 걱정 마시라. 요즘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디지털기기를 하나씩 빌려준다. 덕분에 온라인조사를 할 수 있었다. 필체 감정 걱정 없는 구글폼 가즈아!


게다가 눈앞에 있는 이 쌤은 어차피 며칠 뒤면 안 볼 사람이다. 초등학교에선 2년 연속 같은 담임을 배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보복(?)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날것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너무 놀랐어요]

[그날 하루 종일 무서웠어요]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어요]


아이들이 언급한 날은 딱 하루였다. 나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 한 아이가 정말 위험한 행동을 했다. 당장 제지하지 않으면 다른 학생이 위험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큰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상황은 잘 끝났다. 근데 그게 다른 학생들에겐 큰 충격이었나 보다.(욕설, 폭행 그런 건 당연히 안 했다ㅠ)


나는 평소에 학생들에게 높임말을 쓴다. 이름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철수야, 영희야"라고 부르지 않는다. "철수 님, 영희 님"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은행 창구 직원 같던 사람이 갑자기 샤우팅을 하니 간이 떨어지는 충격이었나 보다. 내가 학생이라도 놀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소리 지른 건 그날 하루였다. 그런데 복도를 지나가던 제자님께선 도대체 왜 내가 항상 화를 냈다고 했을까? 솔직히 매일 큰소리 낸 건 아니잖아. 이거 너무 비약 아닌가 엉엉.


수년간 풀리지 않던 미스테리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풀렸다. 바로 강원국, 김민식 작가가 쓴 <말하기의 태도> 덕분에 말이다.



두 사람은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대통령 두 분을 모신 연설비서관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mbc PD였다. 두 사람 모두 책을 많이 썼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며 마이크 잡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니까 이 두 사람은 말하기의 고수라는 뜻이다.


나도 나름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선생에게 혓바닥이 없으면 큰일 난다. 하지만 나는 갈길이 먼 초짜 선생이다. 이제 겨우 10년을 채웠기 때문이다. 앞으로 갈 길이 2~30년이나 남았다. 롱런하기 위해 두 초고수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말하기보다 중요한 게 태도입니다."


다시 한번 책 제목을 봤다. <말하기의 태도>였다. 그런데 내용은 달랐다. 말하기보다 중요한 게 태도란다. 이럴 거면 <말하기보다 태도>로 제목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은 베테랑 강연자다. 그런 그들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강연자는 자기가 뭘 말할지 신경 씁니다. 하지만 청중은 달라요. 청중이 기억하는 건 강연자의 멋들어진 명언이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강연자의 태도를 기억합니다. 그날 무대 위에 있던 사람이 어떤 자세였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표정은 부드러웠는지 같은 것들이죠. 결국 말하기보다 중요한 게 태도입니다."


나도 어떻게 보면 강연자다. 우리 반 학생들 앞에서 매일 떠드는 사람이니까. 자연스레 학생들은 청중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반 학생들이 기억하는 건 내 태도다. 나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고 말이다.


예전 그 설문조사를 다시 들춰봤다. 1년 중 가장 재밌었던 날은? 역시 국어, 수학 공부하던 날이 아니었다. 나랑 한바탕 웃고 떠들던 순간이었다. 반면 1년 중 가장 불편했던 날은? 그날도 역시 영어, 과학 공부하던 날이 아니었다. 내가 위험한 상황을 강하게 막던 순간이었다.


그날 원인을 제공했던 아이 언급은 아무도 안 했다. 그 학생의 잘못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담임교사의 너무 큰 목소리만 뇌리에 박힌 것 같았다. 얼마나 임팩트가 컸으면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항상'이라고 바꿔 느꼈을까.


내 딸은 유치원생이다. 학부모가 되어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딸도 담임선생님에 대해 얘기하는데, 단 한 번도 "우리 반 쌤은 명강사야"라고 한 적이 없었다. "우리 반 쌤은 잘 웃어주셔.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말도 부드럽게 해 주셔."라는 말은 했다. 그렇다, 죄다 '태도'다.


나는 담임질(?)을 뛰어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생 최고의 은사님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아이들 마음에 상처 주지 않는, 그냥 지나가는 담임쌤이 되고 싶다. '그때 그 5학년 때 담임쌤이 누구였지?'면 최고다. 무색무취로 잊히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구체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 책에 팁이 많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바로 '입 닫고 귀 열기' 전략이다.


듣기 때문에 이불킥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자기 전에 이불을 천장으로 걷어차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말하기 때문이다. 옛말에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선조들의 가르침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그러므로 말을 최대한 줄이자.


하지만 나는 혓바닥으로 먹고살아야 한다. 말을 아예 안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볼 수밖에.


<말하기의 태도>


나란 놈이여, 거울 보면서 연습하자. 자, 윗니 아랫니 도합 16개 보이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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