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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리 Oct 30. 2022

진짜 관계, 가짜 관계

여름, 진료실 안

1.


“저는… 외로운가봐요.”


이전 진료 때 울먹이며 저렇게 말하고 나서, 조금 놀랐다. 외롭다고 말하는 게 슬프다니? 그래서 이번 진료에서 다시 그 일을 언급했다.


“선생님 저는, 외롭다는 걸 인정하는 게 힘든 것 같아요. 너무 부끄러워요. 충동적으로 섹스한 거? 안 부끄럽거든요. 정신과 의사 좋아하는 거?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요. 그런데 외롭다고 하는 건 부끄러워요.”


글을 쓰며 정리했던 대로 의사에게 말했다. 부끄럽지 않다는 예시들은 내가 외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강조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의사를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치의는, 내 의도와 다른 것들을 끄집어냈다. 


“진짜 관계와 가짜 관계에서 다르게 느끼는군요.”


저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어요.”


“외로움은 ‘진짜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말씀하신 남자나, 정신과 의사와는 ‘가짜 관계’ 인거죠. 그러니까 부끄럽지 않은 것이겠죠.”


충격 받았다. 다소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가짜라뇨?”


“여기에 와서 정신과 의사를 좋아한다고 하는 건, 진심이라기보다는 ‘나를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의미죠.”


“그건 당연하죠!”


미워하지 않길 원하는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나를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이 필요한 관계란 거죠. 얘기가 좀 복잡해졌지만….”


수치심이 천천히 올라왔다.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창피하네요.”


그는 뭐가 창피하냐고 물었다. 나는 횡설수설했던 것 같다.


진료실을 나갈 때쯤에는 수치심과 더불어 분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느끼는 격양됨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내내 생각했다. 가짜라고? 가짜? 내가 자길 좋아하는 게 가짜라는 거야? 우리의 관계를 겨우 몇 번 섹스한 남자와의 뭣도 아닌 관계와 동일선상에 둔 거야, 지금? 


생각이 계속 뻗어나갔다.


내가 부담스럽나? 내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가짜’라고 하고 싶은 거야? 예전엔 수용해준다고 했잖아! 망할 의사!


의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빨리 다음 진료일이 와서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동시에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전자가 9할, 후자가 1할정도였지만. 나는 병원에 또 갈 거였다.



2.


7일 뒤,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지난번에 진짜 관계, 가짜 관계라고 하셨잖아요. 왜 가짜란 말을 쓰신 거예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내가 이 말을 꺼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치'라고 하죠. '대치.' 아시겠지만 (난 뭔지 몰랐다.) 부모에게 가진 감정이 치료자에게 바뀌어서 나타난다거나. 그런 것을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려다 보니 가짜라고 한 것 같아요.”


대치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transference)’ 얘기와 다를 바가 없잖은가.


“저는 선생님이 제 감정이 가짜라는 건 줄 알았어요. 제 감정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감정은 가짜일 수 없죠.”


왠지 오늘 주치의의 태도가 상냥해서인지, 간단히 납득이 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쉽게 수긍한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지적했다.


“그래서 가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치료자에게 가졌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뛰었어요.”


“아… 그때 제가 선생님에게 가졌던 감정이요…?”


“네. 중요해요.”


당혹스러워하다, 내가 써 갈겼던 날것의 감정들이 생각났다. 위에 썼듯이, 얼른 다음 진료일이 와서 의사에게 화를 낼 것이라는 둥, 병원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둥. 

“선생님이, 제가 선생님 좋아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서 가짜라고 한다고 생각했어요. 절 밀어낸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렇다. 듣고, 내 감정 상태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이날의 진료는 침묵이 굉장히 잦았다. 나는 안절부절했다. 무슨 얘길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몇 번을 말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좀 집어주세요.”


“저는 항상, 집어드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안절부절. 나는 말하지 못하고, 그는 그저 기다렸다. 나는 불안해하며, 반쯤은 농담삼아 말했다.


“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고 진료 빨리 끝내시면 안돼요.”


“그럼요.”


그가 눈을 돌릴 때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선생님 지금 딴 생각 하셨죠.”


“말씀하시는 것 다 듣고 있었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어질까봐 불안해하는군요. 시간 얘기를 한다든지, 주의를 돌리지 않길 바란다든지.”


“방금은 장난이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진료 거부를 하지 않는 이상, 제 자리는 있는 거 아녜요?”


"실제로 있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제가 받은 느낌을 얘기한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가 있는 진료실에 계속 있고 싶었다. 


3.


입술을 달싹이며, 지금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바보같다고 느꼈다. 


“뻔한 얘기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가 아직 좋아하는데, 절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뻔한 얘기지만, 그걸 말하는 게 중요하죠.”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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