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진료실 안
1.
“무척 무기력해요. 6월을 다 날린 것 같아요. 책도 두 권인가 밖에 안 읽었고, 글도 안 썼어요. 과외도 안 구해져요. 전 되게 쉽게 구할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자던 친구’(섹스하던 남자)한테 까였어요.”
그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기력한 걸 수도 있어요. 잠을 엄청 많이 잤어요. 어쨌든 … 왜 까인 걸까 생각도 해보고. 생각을 하다 보니 제가 만났던 남자들 생각도 나고. 전 망했어요.”
‘망했다’라는 말은, 내게 또 하나의 스치듯 짧은 만남이 쌓였고, 나는 그 경험의 축적이 가끔 절망적이라는 뜻이었다.
끝이 났으므로, ‘자던 친구’는 내게 개별 인간에서 뭉뚱그려진 ‘남자’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나는 ‘남자’와 내가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어.’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추측’인 이유는, 그 뒤 일주일을 무기력하게 보내다 보니 진료 당시의 내게 감정 이입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겨우 일주일 전의 나인데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월요일이 내 생일이었다는 말도 했다. 그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보시면 이제 서른살로 바뀌었을걸요?”하고 말했다. 주치의는 미소 지으며 “생일 축하드려요.”하고 말했다. 엎드려 절 받기지만 좋았다.
“사실 조마조마했어요. 작년 생일은 최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날 바로 이 병원에 예약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1년 된 거예요! 아무튼 또 최악의 날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많이들 챙겨주더라고요. 좋았어요. 심지어 예전 과외 학생한테도 연락이 왔어요. 기분이 좋더라고요. 엄마는 근데 또 돈 얘기하셨어요.”
“어떤 식으로요?”
“뭐 카드 값 밀렸다, 또 대출 내야한다, 그런 얘기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말씀하셔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도움도 청했었고. 그런데 곧바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 없다고 느꼈겠군요. 일을 어서 하라는 압박처럼 들렸을 테고요.”
“네, 그랬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2.
“다소 충동적인 행위의 이유를 알면 좋을 것 같아요. ‘자던’친구라는 말을 하셨어요. 그리고 나서는 무척 많이 ‘잤다’. ‘잤다’는 말이 겹치죠. 성행위를 했다. 그리고 잔다는 건 눈을 감는 거죠. 성행위가 무언가로부터 눈을 감는 행위일 수 있겠어요. 예를 들어 ‘관계를 맺기 어려움’으로부터.
생일 이야기도, 혼자일까 두려웠는데 많이 챙겨줘서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의지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 응원과 지지를 해줄 존재가 필요한데, 관계를 맺긴 어렵고. 그 어려움에 눈을 감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예전엔 더 그랬어요. 예전에 가벼운 관계를 많이 가질 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나 자신에게 ‘이것 봐, (캐주얼하게 섹스해도) 난 아무렇지 않아’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저는 … 외로운가봐요.”
-가봐요, 를 어눌하게 발음하며 울어버렸다. 평정을 잃은 숨이 음절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쪽팔려. 주치의가 약 처방을 하는 사이 눈물을 닦았다. 금방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저도 정서적으로 의지가 되는 … 안정된 관계를 맺고 싶어요. 그런데 ……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뭐를 ‘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예요. 지금 나의 상태를 알기 위한 거예요.”
주치의가 무언가 더 얘길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가장 수치스럽다. 충동적인 섹스?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주치의에게도 말했지만, 누군가에게 성적 매력이 있다는 걸 확인해서 좋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것?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정신과를 다니는 것 자체? 불이익이 있을까봐 걱정할 순 있겠지만 역시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근데 내가 외롭다고 인정하는 건 부끄럽다.
좀 더 범위를 좁혀 말하자면, 내가 (성관계뿐이 아닌) 이성애 관계에 대한 욕구가 있고 그걸 충족할 수 없다는 게 쪽팔린 것인가? 근데 그건 딱히 쪽팔릴 일이 아니지 않나? 아쉬운 일인 거지.
그런데도 외롭다는 건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 모르겠다, 오늘은 생각 안 해야지. 이렇게 또 '눈을 감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