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진료실 안
1.
상쾌했다. 주치의의 조언이 명쾌해서 뇌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혼란스러움에 대해 말했다. 요새 최대의 이벤트는 섹스였으므로 그 상대에 대한 얘기였다.
“그동안 혼란스러웠어요. 그 뒤로 한 번 더 만나서 잤는데요. 이번에도 좋았어요. 그런데 뭔가…그 이후에 연락이 뜸해지니까 허전해요. 그 전에는 연락이 너무 많아서 좀 귀찮았거든요? 막상 이렇게 되니까 괜히 허전하고, 불안하고 그래요. 더 복잡해지기 전에 도망쳐야만 할 것 같아요.
걔도 그렇고, 저도 걜 남자친구로 삼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머리로는 그래요. 제가 정서적으로 의지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그런데도 뭔가 신경쓰여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꼭 그 관계가 일대일의 관계여야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유일한 상대인 것처럼 말하네요.”
주치의가 그렇게 말하자, 아 내가 그러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고 조금 멋쩍어졌다.
“제가 멀티가 잘 안돼요. 항상 그랬어요.”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걘 제가 만나본 남자 중 섹스를 손꼽게 잘해요. 남자마다 천차만별이란 말예요.”
나는 어느새 내 양 뺨을 감싸쥐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남자마다 천차만별이란 말예요오…. 이건 정말 드문 미덕이다.
나는 정리되지 않은 말을 두서없이 계속 했다. 쭉 듣더니 주치의는 다음과 같이 말했고, 내겐 그 말이 명쾌하게 들렸다.
“성적 충동과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네요.”
“구분하라는 건가요?”
“그러면 편해지겠죠.”
세상의 잣대나 도덕 등을 떠나서, 내 마음이 편한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듯해 안심이 되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단 걸 알지만, 왠지 잘못을 저지른 학생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맞아요…걘 장점이 섹스밖에 없어요…”
나는 왠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2.
“처음 연애했을 때부터 이래왔어요. 누군가가 좋아지면, 제가 엄청 큰 결핍이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상대의 애정으로 결핍을 채우고 싶었어요. 감정적으로 엄청 의존했고요. 그러다가, 그러면 남자들이 안 좋아하니까 티는 안 내려고 하고. 그래도 계속 그랬어요. 불안해하다가 관계가 끝나면 평온해지고. 또 누가 좋아지면 불안하다가 막상 끝나면 또 평온해지고.”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남자만요. 제 양육 과정과 관련이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되물었다.
“음, 저는 처음 남자를 사귈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럼 그 전의 남자에게 영향받은 것도 아니니까, 양육자의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 꿈이 생각나네요.”
그는 내가 예전에 말했던 꿈이 생각난다고 했다.
“…아빠한테 강간당하는 꿈이요?”
나는 그러한 내용의 꿈을 꽤 오래 꿔왔다. 꼭 강간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와 성적인 것, 폭력적인 것이 섞인 꿈들이었다. 그 순간엔 현실과 착각할 정도로 끔찍했다. 아버지가 폭력적일 때가 있었지만, 내게 성폭력을 가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더 공포스러운 꿈이었다.
“의지할 남자가 다가오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란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전 그 꿈을 꾼 지 아주 오래됐는걸요.”
“결핍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했잖아요.”
나는 눈썹을 올린 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태어나 가장 많이 본 남자는 아빠니까, 아빠가 어떤 상징적인 존재일 순 있겠지.
3.
나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섹스하고 싶어. 남자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고 싶어. 남자에게서 안정을 찾고 싶어. 아빠 같은 남자는 싫어. 섹시했음 좋겠어. 다정했음 좋겠어. 하지만 아무리 다정해도 고추가 작은 앤 사랑할 수 없는 걸…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무튼 선생님, 성적 충동과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구분하는 착한 학생이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태까지는 항상 전자를 좇았던가... 모르겠다,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