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진료실 안
1.
“지난번에 경제적 곤란에 대해 말씀하셨죠. 어떻게 하셨나요?”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가 잊고 있었는데 주치의가 먼저 물어서 다행이었다. 지난 진료 때 학자금 대출금이 연체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지금 일을 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나는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기가 싫었다. 무서웠다.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입금해주셨어요.”
“어땠나요?”
“다행이다.”
뭔가 부족하게 말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는 감정도 있었지만, 이 얘기를 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때 진료 때 선생님이랑 이 얘기를 하고서, 제가 엄마한테 돈 달라고 하는 거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군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전에는 그렇게 생각 못했거든요. 그냥 ‘아 말하기 싫다, 어렵다…’ 하고서 감정에만 몰두해 있었어요.”
2.
주치의는 내가 무기력한 이유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꼽았다. 항상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니 무기력한 게 아닐까, 그는 추측했다.
나는 내 앞날의 불확실성이 두렵고, 그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무기력해지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무기력함의 원인이 과연 그것일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내가 먹고 살 수 없을 까봐 두려운 걸까, 아니면 엄마에게 ‘아빠 같은’ 존재가 될 까봐 두려운 걸까? 나는 내가 무기력할 때 ‘자기 인생도 제대로 못 꾸리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자신을 비난했는데, 그 모델을 누구로 무심코 생각하고 있는가?
3.
콘서트에 다녀왔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슬펐다고 말했다. 블로그에 쓴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콘서트에 실망했어요. 제가 걔네를 좋아한 지 6년인데, 제가 좋아했던 모습이 아니었어요.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니까 변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저도 6년 전이랑은 다른데. 시간은 흐르고 변한다는 게 슬퍼요.”
“변한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네요.”
그랬다. 이제 내가 좋아했던 이가 없다. 완전히 없는 건 아니지만 내게서 점점 멀어져간다.
“제가 특히 좋아했던 멤버가 있는데요. 제가 사랑에 빠졌던 건 걔의 성격 때문이었어요. 걘 정말 강아지 같이 사람 좋아하고, 친화력 좋고, 깨발랄한 애였어요. 진짜 귀여웠거든요. 근데 이제는, 음 물론 걔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겠지만, 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요. 게다가 걘 외국인이라 이젠 해외 시장에 집중하고,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정치적 스탠스를 보이기도 하고요. 물론 더 잘생기고 더 돈 많고 더 몸 좋고 더 잘 나가지만, 제가 좋아했던 모습은 아니예요.”
이른바 '빠순이' 티를 못 벗어서 어느새 나는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치의의 반응이 의외였다.
“성격 부분은 박오리 씨의 특징인 것 같은데요.”
“저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는 저랑 걔가 되게 달라서 좋아했는데요. 저는 좀 더 내향적이고… 사람은 좋아하지만 친화력은 없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예상치 못한 칭찬을 들은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강아지, 사람 좋아해, 친화력 좋아, 깨발랄, 하고 말했는데? 어머나. 날 그렇게 생각한 거니?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모습을 본 걸 수도 있겠네요.”
“저는 항상 남자는 그런 사람이 좋더라고요? 여자는 좀 더 생각 있어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 말은 왜 한 걸까?
4.
다음 예약을 잡느라 흐름이 한 번 끊겼다.
나는 모든 게 변하는데, 나만 고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주치의는 뭔가 웃는 것 같았다.
“우리가 본 지도 꽤 됐죠. 예전에 말씀하셨던 거랑 요새 말씀하시는 내용이 다르고요. 전혀 고여 있지 않아요.”
이번 진료에서 주치의가 나를 고여 있지 않다고 확언하고, 또 성격이 발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좀 위안이 되었다. 그래, 내 눈에는 안 보여도 나는 흘러가고 있나 봐. 내가 만날 힘들단 소리만 하는 데도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징징거리는 나약한 녀석’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성격을 밝게(?) 생각하나봐.
기분 좋게 진료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