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진료실 안
주치의가 편해진 건지, 내가 술 먹고 진상부린 이야기로 면담을 시작했다. 꽤나 솔직하게 말했다. (ex: 길거리에서 게이 유튜버 끼 떠는 말투 흉내내기… 동생 방 가서 섹스하고 싶다고 난리 치기…) 동생이 정말 추하다고 또 그러면 쫓아내겠다고 했다고도 말했다. 다음날 일어나서 정말 창피했다고도 말했다. 주치의는 표정 관리를 하며 듣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친구들과 술을 먹고 흥이 잔뜩 오르긴 했었다. 왜 그렇게 흥이 올랐담…?
가볍게 술 주정한 이야기를 하고, 우리의 면담의 메인 테마는 요새는 부모이므로, 엄마 얘기를 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더러 결혼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특정 직업(아버지의 직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얘기도 했었다. 결혼은 자신이 후회하고 있어서 그랬을 테고, 아버지의 직업은 그 직업의 여러 특성들에 치가 떨려서였겠지.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아니고, 한편 나는 어머니도 아닌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언행이 내게 압박을 줘서 괴로웠다. 나처럼 되면 안돼! 아빠처럼 되면 안돼!
2.
지난번 진료의 어떤 부분에서, 선생님이 내게 “이제 어른이 되는 게 어때?”라고 말하는 듯했다고, 아마 당신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을 텐데도 내겐 그렇게 들렸다고 말했다. 주치의는 잠시 고민하다, 약간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른이 뭔데요?”
“저도 생각해봤어요. 막상 생각하면… 돈을 안정적으로 벌면 어른인가? 결혼을 하면 어른인가? 아이를 낳으면 어른인가? 그건 아니잖아요? 굳이 생각해보자면… 자기를 좀 책임질 수 있는 사람? 제가 제 자신을 좀 애같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주치의는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에 심리적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 했다. ‘부모를 나의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으로 꼽는 것 = 애 같은 것’, 이라고 내가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하고 있잖아요. 저 협조적이잖아요?”
“그럼요.”
주치의는 꽤나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3.
나는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엄마를 무고한 피해자로만 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타입이므로, 그게 용인될 수 없으므로, 아버지의 잘못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일부러 더 세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딸의 싸움에서, 딸이 ‘감히’ 라는 말을 쓰진 않을텐데, 나는 일부러 한다고 했다.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런 식으로.
“왜 어머니를 지킬 때가 아닐 때도 아버지에게 세 보이고 싶죠?”
“글쎄요… 기를 죽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버지가 함부로 굴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걸 그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다.
한편, 아버지는 나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한 적도 있고, 자신을 경멸하지 말라는 말도 한 적이 있다. 아, 이 사람은 나에게 인정받고 싶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나는 내 특성 중 부정적인 부분은 다 아버지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버튼 눌리면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조울증도.
주치의는 "편하겠어요." 라고 말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편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요."
4.
술주정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물었다.
“제가 술 먹고 진상 부린 건 괜찮은 걸까요?”
“부모의 얘기보다 나의 얘기를 말하고 싶다는 걸로 들리네요.”
아이, 참. 그냥 정상인 범주의 주정인지가 궁금하다고. 내 무의식 분석하지 말라고.
그래서 말해버렸다.
“……선생님은 제 모든 말들을 다 분석할 거리로 생각하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요새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을 ‘상징맨’ 이라고 불러요. 모든 말을 다 상징으로 생각한다고.”
의외로 그는 좋아했다.(?)
“좋은 호칭이네요.”
“상징맨이요…?”
“영광스러운 호칭이네요.”
오호라. 영광스럽기까지. 그럼 계속 써먹어야겠다.
5.
“이걸 드라마라고 한다면, 나의 드라마일까요, 부모의 드라마일까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는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엄마의 캐릭터는 이렇다, 아빠의 캐릭터는 이렇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 대응한다. 이런 말을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 감정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건 제 드라마가 아니라 부모님의 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주치의는 늘 그렇듯 별 말 없이 듣고 있었다.
6.
마지막으로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내 소설의 인물들이 생각났다. 강하고, 과묵하고, 감정이 메마른 듯한 소녀와 다정하고 상냥한 청년.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소녀와, 내가 원했던 남자의 모습인 것 같아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걸 원했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주치의는,
“제게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로 들려요. 어머니가 강하고 과묵했더라면 아버지가 ... (생략)”
납득이 가지 않아 뒤의 말이 흐릿하다.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
“…상징맨이 틀린 것 같아요."
그는 그러냐며 웃었고 진료는 끝이 났다.
아무래도 나만 이 면담이 재밌는 것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