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진료실 안
이번 진료는 날 꽤나 짜증나게 했다. 주치의가 나름 성의껏 그의 분석을 들려주었지만, 동의가 되지 않는 디테일 — 혹은 그와 나의 근본적인 전제의 차이 — 이 거슬려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에게 아래의 글을 보여주었다.
2.
페미니즘과 내 삶이 강하게 엮이기 시작한 건, 너무 자주 말해 지겹지만, 남자친구가 내 나체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 사건 이후다. 당연히 내 주위의 친구들이 나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지만, 자책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은 내 잘못’, ‘쟤를 좋아한 내 잘못’ 등. 내가 나를 스스로 성적 대상화한 걸까, 하고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고민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자기가 스스로 성적 대상화하면 어때, 멋대로 올린 새끼 잘못이지, 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 가해자가 한 고민이라곤 ‘아 씨발 잘못 걸렸다, 내 인생 좆되면 어떡하지’ 정도일 텐데, 나는 과도하게 성찰적이었던 듯하다.
아무튼 과도하게 성찰적인 대학생이었던 나는 내 사건을 페미니즘의 시각, 대체로 ‘교과서적인’ 페미니즘의 시각을 통해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지으려고 했다. 나름대로 잘했다. 음,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은 여성의 몸을 서로 선물하며(예를 들어 성접대, 남초 커뮤니티에 야짤 올리는 것도.) 남성 연대감을 다지는군. 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과시적인 것도 있겠군.(왜냐면 가해자는, 다른 남자들이 내 몸 사진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대했다.) 동시에 이러한 종류의 ‘과시’는 남성과 여성에게 맥락이 많이 다르군.
이러한 시도는 내가 사회를 보는 시각을 벼려주었지만, 거기에 내 마음은 빠져있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뭔가 여전히 허하다는 걸.
그때 사귀게 된 남자는 같은 과 선배였고, 딱히 공감능력이 없는 타입이었다. 나는 이 남자를 떠올리면 항상 ‘애새끼’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애새끼. 찡찡이. 얘는 그냥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고(그의 전 여자친구 분과 나를 생각해 봤을 때 그는 강하고 똑똑한 여자에 끌리는 타입이었는데, 나는 하나도 안 강했고 강해봤자 그 남자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나를 위로할 생각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만난 남자도 어지간히 최악이었다. 그는 후배였고, 나와는 학번 차가 많이 나서 같은 수업을 통해 서로 존재를 아는 정도. 그러다 어떤 발표 때문에 스몰 토크를 나눌 정도가 되었고, 여자한테 작업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 친구는 내게 페이스북 메시지로 (핸드폰 번호도 없었다는 소리다) ‘선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밥을 먹자고 했다.
이 친구와 자게 되기까지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귀기로 했다가, 그냥 자는 사이로 지내기로 했고(내가 제안했다), 그리고는 가끔, 서로를 기분 나쁘게 하며 만나곤 했었다. 그는 내가 대학에서 본 가장 불안정한 남자였다. 그냥 가진 게 많고 애교가 있어서 여자를 엄청 갈아치우곤 했지만, 정신이 건강하지 않다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기분 좋을 때는 애교 떨다가 자기 마음대로 날 통제할 수 없을 때면 성적으로 모욕하기도 하고. 뭐 지금 보면 진짜 이상한 애고, 지금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정말 행복해질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걔의 한 조각의 상냥함이 너무 좋았다. 나는 따스함에 갈급했다.
그 후론 대개 가벼운 관계들이었다.
나는 아마 감정과 섹스를 분리해서 통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되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원하는 건 따뜻함이고… 망했다. 이제는 분리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며, 물론 남자를 만날수록 상처에도 무뎌지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상처였다.
페미니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남자 얘기를 줄줄 늘어놓는 걸까?
의사가 ‘상징적’이라고 말한 사건, 그 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나는 분명 어떤 면으로는 강해졌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벼려졌고, 예전엔 애매하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움이었고 여전히 즐거움이다. 더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람이 되었고, 뭐 이래저래 장점이 크다. 무엇보다 날 지켜주었다. 가장 절망적일 때 나를 지켜준 것이 친구들과 페미니즘이었다. 남자가 아니라.
여전히 남자는 내게 성적 대상이지만, 도저히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내가 어디까지 용인하고 어디서부터 주의를 줘야 할까? 하고 생각한다. 아니 이건 나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이 남자를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참아야 내가 안전할까?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나는 가해자를 너무 좋아했다. 최근 그에게 보내는 글귀를 읽으며, 그 글귀가 하나하나 나같고 사랑이 가득해서 괴로워졌다. 내 사랑이 너무 진짜라서 괴로웠다. 가해자도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사랑이 대체 무슨 의미야?
남자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페미니즘이 나를 남자로부터 지켜줬고, 남자와의 관계 불가능을 알려줬다고.
남자와 (성적으로) 가까워지면, 결국 안전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따뜻함은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구닥다리 믿음 문장들이다.
3.
나를 보호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게 절박했지만, 여전히 남자와의 관계에서의 따스함을 원한다는 이야기. 주치의는 진지한 표정으로 위 글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내게 더 말을 시켰다.
나는 두서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1) 버스를 타고 오면서 깨달은 것인데, 내 전남친 ‘찡찡이’가 내게 심하게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나는 얘를 유독 진저리치며 싫어한다. ‘찡찡이’는 ‘강하고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니 나의 어머니가 나를 ‘강하고 똑똑하다’고 여긴다. 나는 그래서 ‘찡찡이’가 유독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강하다고 여기며 내 마음을 방치하니까.
2) 나는 가해자를 정말 좋아했다. (말하면서 눈물이 고였다.)
이제 주치의의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 느낀 인상은, 내가 ‘강한 남성상’(?)의 ‘보호’(?)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를 보살펴주지는 않고 오히려 보살핌을 바라는 어머니와의 경험 때문에 ‘찡찡이’의 나를 보호해주기는커녕 보살핌만 바라는 태도가 싫었을 것이다.
‘강한 남성상’의 보호를 바라고, 그와 가까워질 때 성적으로 끌리는 것도 당연한데, 성적인 부분이 도리어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대표적으로는 전남자친구의 가해.) 이것은 아버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동의 못 함.) 아버지는 가족을 지켜주는 사람이지만,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어쩌라고? 싶었다.)
주치의는 이런 이야기를 마치고,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선생님은 대체 어떤 학자를 좋아하지? 프로이트? 융? 아들러?’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주치의는 일단 내 질문에 답했다. 자신이 말한 것들은 정신과 의사라면 모두 배우는 것들이다. 자신이 특정 학자를 전공했다면 PR에 써 놓았을 것이다. 그런 물음이 드는 것은, ‘내가 공격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다.
주치의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나름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강한 남성상’의 ‘보호’를 바란다는 게 좀 화가 나는데, 사실 주치의는 내가 그 부분에 화가 날 거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 같다. 나는 결국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고 말했다. 대체 선생님은 ‘보호’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느냐? 주치의는,
“말 그대로 보호요. 보살피는 것이요. 어머니가 아기를 보살피듯이. 아기는 할 수 있는 게 없죠, 우는 것 밖에.”
하고 답했다. 나는 ‘보호’보다는 ‘보살핌’이라면 그나마 납득이 간다고 생각했다.
“몰랐어요, 그런 뜻인지.”
아니 보호는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지키는 것 아닌가? 보살핌이랑은 좀 차이가 있지 않나?
차마 '강한 남성상'에 대해선 묻지 못했다. 그럼 굳이 약한 남성상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흔한가? 물론 나는 평소에 '겉마속페'(겉은 마초 속은 페미니스트)를 좋아한다며 놀림받긴 했지만.
나는 강한 남성상의 보호를 받고 싶지만 남자에게 상처받은 그런 가련한 여자라는.
이거 나 치료되는 거 맞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