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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25. 2024

이름값 하러 나선 춤

스텝 2. 나무자세


속절없이 후들거린다. 한 발을 딛고, 중심을 잡는다. 다른 한 발은 허벅지 안쪽에 단단히. 찰나, 아니라면 뒤뚱대지 않고 버티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의 이름이 나무자세라는 것을 쉬이 믿을 수가 없을 지경. 당신의 나무는 뿌리가 썩었어요.라고 하면 차라리 위안이 되겠다. 그렇다면 심신 미약으로 형량 대폭 할인을 요구해 봄 직도.


발은 둘인데 왜 한 발로 중심 잡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피어오른다. 진화하여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나, 호모사피엔스들이여. 네 발 짐승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말하면 우아하게 고상을 떨며 단박에 아유를 쏟을 자신이 있는가.


그 사이 발바닥은 저 혼자 방울방울 추억에 잠긴다. 땅에 붙은 발바닥서부터 다리를 타고 울렁, 곧 턱끝까지 울렁울렁 대는 것이, 몸집 작던 시절에 즐기던 트램펄린 위에 서있는 것 같다. 땀이 나고, 울렁이고, 내려오면 단단한 땅의 현실감에 세상과 어색해지고 마는. 다른 점이 있다면 다 커버린 울렁임엔 까르르 웃는 소리는 음소거다. 즐거움의 결여. 그저 몰려오는 파동을 버티고 서야 한다.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몸은 이따금 훌쩍 슬퍼진다. 덩칫값을 못하고.




아빠의 가족들은 아들이 그렇게 좋더랬다. 비싼 돈을 들여 태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오빠의 이름을 지어놓은 것에 엄마는 생각했더랬다. 나의 탄생에 그런 환대까진 아니더라도 불러줄 이름은 마땅히 준비해 놓을 줄 알았다고. 오해를 했더랬다. 세상에 나온 나는 불릴 이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쨍쨍 우는 나를 무어라 부르며 다독일 줄을 몰랐더랬다. 슬픔도 모르면서 쨍쨍, 울어댔겠지. 그런 나를 안고 있던 슬픔 아는 여인은 어쩐지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짠해질 뿐.


대명사로 존재하며 누구에게도 특별해지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사랑 담겨 불리지 못한 한때만큼 구멍 난 채 자라고 있었나. 하는 생각쯤엔 상처받지 않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 그리 세상을 익혀버린 슬픔 아는 어른이 되어 작고 또 작고, 그리하여 무엇도 몰랐던 나를 그려본다. 즐거이 쓰지도 못할 것을 많이도 배워 어느새 쨍쨍 울지 못하는 몸집 큰 이는 쨍쨍 잘도 우는 작은 이가 이따금 기특하다.


덕분이었다. 돌림자로 단단히 막혀있던 고상한 이름들의 강강수월래 향연에 아름다운 깍두기 이름을 얻어낸 것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데, 유치원에 다니던 때 자기소개를 하던 몇 마디 문장만은 어렴풋이 생각난다. “한별. 큰 별이라는 뜻. 엄마가 지어줬어요.” 수줍게 내뱉으며 피어오르는 은근한 자부심과 기쁨도 기억이 난다(이 모든 게 조작된 기억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름값이란 거. 할 수 있을까.


쉬이 이름값을 하게 두지 않는 세상. 밸런스 게임을 청해 온다. 애석하게도 우리네 소소한 인생은 모든 선택지가 밸런스 게임. 파국과 파국의 싸움에서 그나마 덜 엿 먹는 길을 택할 수 있을 뿐, 이상적인 답은커녕 중간 언저리도 보이지 않는다. 물리적 부재가 아닌 여유의 부재. 도심 중의 도심 강남의 땅값처럼 중심가에 가까워질수록 비싸다. 못 산다. 평화로움과 꿈의 조합은 유니콘이다.


왜 아니겠는가. 때로는 덜컥, 밸런스 게임에 응해버리고 싶다. 한쪽의 극단을 참아내는 것 역시 고되겠으나, 다른 한쪽은 가린 채 한쪽만 줄곧 견디면 된다는 단순함에 안도해 볼 순 있잖은가. 중심 잡기는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또는 00돌침대. 난도가 너무 높다. 별이 다섯 개. 나는 그 두려운 다섯 개의 별을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큰 별일까. 무례하게 눈앞까지 들이미는 선택지를 자신 있게 뒤로하고 새끼발톱만 한(어쩌면 그보다 좁은) 지름 가진 나의 야트막한 중심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후들후들. 오늘도 불안한 스텝으로 중심 잡기가 시작된다. 별이 될 수 있을까.




내부 열에 의한 팽창압력이 스스로를 붕괴시키려는 자신의 중력과 균형을 이룰 때, 이를 정역학 평형 상태라 한다. 이 상태가 될 때부터 천문학적으로 별이다. 그리 부를 수 있다.


그랬다. 별은 쉬이 타협하지 않아 별이 됐다. 폭발할 것 같은 상태를 중력으로 끌어당기며 불안정한 팽창도, 수축도 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여 비로소 별이라 불린다. 끝없는 줄다리기. 저릿해올 정도로 줄을 잡고 버텨야 한다. 손쉬운 것만으론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는 명확하고도 자연스럽다. 스스로 빛날 줄 아는 이가 되고 싶다는 이에게 별은 말해줄 게다.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한다고. 괴로울 테지만.




합장을 한다. 새어 나가는 중심을 단전으로 불러 모은다. 눈을 감으면 까마득 어둠 속. 광활한 우주에 외로이 빛을 내는 항성을 떠올리며 들어 올린 발을 내려놓지 않는 것 정도야, 입모양으로 주절대며 버텨본다. 흔들린다.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흐르는 땀이 무색하게 여전히 나의 춤은 비틀댄다. 화려한 스텝을 밟지도 않으면서. 하지만 속절없이 픽 스러지진 않으려 중심을 잡는다. 발가락 끝이 새하얘지도록 아득바득 힘을 주고는.


머리 위로 강풍기가 쫓아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휘청댄다. 이왕 불어오는 바람, 뮤직비디오 주인공인 양 밤새 머리칼을 흩날려보자. 옅게 뿌리내린 다리가 면면하게 옴짝달싹 댄들 이름값을 하러 나선 한판 춤은 멈추지 않을 테니.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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