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과 「절망」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 (14)
“‘절망’ 속에서도 정신의 ‘높이’를 추구한 시인”
김수영의 시 「공자의 생활난」은 「아메리칸 타임지」와 함께 사화집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1949)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에 따르면 “박인환이 말리서사(茉莉書舍)를 그만 둔 후”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등과 함께 사화집을 발간하게 되어 갑작스럽게 두 편을 써서 수록했다. 김수영은 이를 “조제람조(粗製濫造)한 히야까시(ひやかし, 놀림) 같은 작품”이라고 자평하면서 자신의 실질적인 처녀작은 다른 작품(「거리」)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나의 처녀작이라면 이 사화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이 나의 처녀작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실질적인 처녀작은 여기에 수록된 「아메리칸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도 아니고, 「묘정의 노래」도 아니다.
김수영은 그에 앞서 조연현이 주관하던 동인지 『예술부락』 창간호(1946)를 통해 ‘인쇄로 되어 나온 최초의 작품’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것까지 모두 자신의 마음에 흡족한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김수영은 “연극을 집어치우고 혼자 시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발표할 기회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예술부락』은 그가 “붙잡을 수 있었던 최초의 발표의 기회”였고, 단지 그런 사정 때문에 조연현에게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하필이면 고색창연한 「묘정의 노래」”가 선택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김수영은 “바보 같은 콤플렉스”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예술부락』 창간호는, 박인환이가 낸 ‘말리서사’라는 해방 후 최초의 멋쟁이 서점의 진열장 안에서 푸대접을 받았고, 거기에 드나드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묵살의 대상이 되고, 역시 거기에 드나들게 된 내 자신의 자학의 재료가 되었다.
어른들을 따라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어린 시절의 성지’였으며 “關公(관우 - 인용자)의 입상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는 동묘(東廟)에서 이미지를 딴 「묘정의 노래」는 그 고색창연함으로 인해 당시 박인환 등으로부터 ‘낡았다’는 수모를 받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낡은 작품’은 김수영에게 ‘멋쟁이 모더니스트’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마음의 작품목록’에서 지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은 김수영에게 그저 평범한 사화집이 아니었다. 콤플렉스의 대상인 박인환 등 ‘멋쟁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에게 부당하게 씌어진 ‘낡음’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생활난」과 「아메리칸 타임지」는 작품의 개별적인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묘정의 노래」가 취하고 있는 다소 의고적인 언어와 시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욕을 함축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전문
「공자의 생활난」은 (1)시어와 (2)시행의 측면에서도 (3)각 연의 구성과 (4)연과 연 사이의 생략이나 비약의 면에서도 「묘정의 노래」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도 상부, 작란, 발산, 작전, 사물, 생리, 한도, 우매 등의 한자어가 시어로 사용되었으나 그것은 현재도 사용되는 단어로 주작성, 시전, 호궁, 한아, 여연보다 현대적이며,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처럼 ‘상부’를 위계적 의미로 사용하는 생활 어법과 달리 ‘위쪽’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한 시행 구성의 측면에서도 시어의 신선도는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에 이어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라는 시행을 배치하여 언뜻 조리가 없어 보이는 연의 구성에서도 일단 ‘낯설게 하기’는 성공적이며, 1연의 ‘너’와 2연의 ‘나’의 대응도 그 타당성을 곧바로 산문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시적인 생동감을 보여준다. 김수영은 비록 「묘정의 노래」도 「공자의 생활난」도 자신의 처녀작은 아니라면서 자신의 작품목록에서 지워버렸다고 했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는 이처럼 사뭇 다르다.
「공자의 생활난」은 5연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시어와 시행의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힘든 1연, 2연, 3연에 이어 상대적으로 표의를 명확히 제시한 4연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5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4연은 의미 전달도 분명하지만, 시인 스스로 일종의 선언적 메시지를 제시한 점에서 주목된다. ‘동무여’는 시의 독자가 될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을 범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바로 보마”는 ‘정확히 냉철하게 보겠다’ 혹은 ‘따져서 엄밀하게 보겠다’ 등의 의미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이라는 시행들은 모두 철학적 언술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바로 보마’의 의미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1)사물을 정밀하지 않은 비과학적 태도로 뭉뚱그려 보지 않고, 또 (2)비유적이거나 감상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맥락 위에서 이제 「공자의 생활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연의 ‘꽃’은 식물의 결실에 필수적 과정인 개화와 수분(受粉)이라는 식생을 표현하는 동시에 사상이나 사유의 정점인 열매의 위에서 그것을 빛나게 하는 어떤 표징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정밀하고 엄정한 사유의 ‘바로 보기’가 아니라 줄로 뜀뛰기(줄넘기)를 하며 어떤 불규칙하고 우발적인 행동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너’는 사유에 대하여 작란을, ‘바로 봄’에 대하여 ‘바로 보지 못함’이라는 의미에서 ‘나’의 대자적 존재이다.
2연의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다. 여기서 발산을 미분수학에서 말하는 수렴과 발산, 진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작품 전반의 어의가 수학적인 데까지 이른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연의 ‘발산’은 ‘표현된’ 혹은 ‘드러난’의 뜻으로 볼 수 있다. ‘형상’은 사물의 실체이거나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형상(본질)의 드러남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추구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승패를 예단할 수 없는 ‘작전’과 같이 어려운 일인 것이다.
3연의 ‘국수’는 “먹기 쉬운 것”이라고 했다. ‘쉬운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수월한 것’, ‘좋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상어에서 ‘쉬운’과 ‘좋은’을 혼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2연에서 ‘형상의 드러남’이 ‘작전’과 같이 어려운 일이었는데 3연에서 ‘내’가 그것을 ‘국수’처럼 수월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에 대한 반란일 것이다. 철학 혹은 사유는 국수처럼 손쉽게 목 넘김이 가능한 음식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되씹고 따지고 분석하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이태리의 마카로니도 마찬가지다. 철학과 사유의 지난함에 있어 동서양은 다르지 않다(여기서 이태리는 서구 문화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인 고대 로마의 표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4연의 ‘나’는 반란을 시도하지 않고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라며 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선친이 작고해 어린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하며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인류의 스승이 된 공자와 같이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세계의 본질을 탐문하는 시적 도정을 충실히 걷다가 마침내 ‘죽을 것’이라는 비장한 표현에서 시인 김수영의 결기가 느껴진다(5연,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공자의 생활난」을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면, 김수영은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시적 자세를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김수영은 불의의 사고로 작고하기 전까지 계속되는 생활고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치열한 비판정신과 엄격한 자기관리로 일관했으며, 「절망」이라는 매우 의지적인 작품을 통해서도 그런 정신을 보여주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절망」 전문
모두 8행의 단련(短聯) 작품인 「절망」은 반복을 통한 강조의 효과가 돋보인다. 우선 1행부터 5행까지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 반복되었다. 이는 마지막 행에도 “반성하지 않는다.”로 변형되어 반복되었다. 또 “풍경이 풍경을”, “곰팡이 곰팡을”과 같이 각 시행 안에서도 반복이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〇〇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는 구조가 강하게 결속되어 ‘절망’에 굴하지 않는 시인의 매우 의지적인 태도가 환기되고 있다.
작품의 주된 흐름은, 반성해야 마땅한데 반성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반성하지 않는 굳센 정신이나 자세를 보여준다. 그것은 ‘반성’이라는 윤리적 범주와 무관한 풍경, 곰팡이, 여름, 속도 등이 시어로 제시된 1~4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반성의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재한 물상일 뿐이다. 그런데 5행의 ‘졸렬과 수치’는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반성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즉 졸렬하고 수치스런 자들이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졸렬도 아니고 수치도 아닌 ‘절망’은 결코 반성할 필요가 없다.
가난이든 무엇이든 ‘절망’적인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그것을 반성할 게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밀고나가겠다는 의지가 번뜩인다. 그것은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공자의 생활난」의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변화를 유발하는 ‘바람’은 딴 데서 오고, 참다운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자신을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49년 발표된 「공자의 생활난」과 1965년 작품인 「절망」은 그 창작 시기가 상당히 상거함에도 강인한 비판의식과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김수영 시 특유의 일관성이 견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은 ‘절망’ 속에서도 정신의 ‘높이’를 ‘끝까지’ 추구한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