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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Feb 10. 2022

연암 박지원의 「발승암기」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23)


허명이 아니라 실명을 추구하는 현대성



「발승암기(髮僧菴記)」에는 김홍연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런데 정말 이름만 계속 나온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 종합적인 정보는 주어지지 않고, 그저 바위에 새겨진 이름 석 자와 부분적인 정보로 거듭 나타난다. 도입부부터 상당한 분량까지 인물에 대한 지엽적인 정보 제공을 통해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는 일종의 추리적 기법인 듯하다. 그렇다면 김홍연이라는 인물은 왜 연암 박지원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대문호의 긴 문장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일까.


 연암에게 김홍연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면에서 특별히 주목되었다. 하나는 “석공을 시켜 다람쥐,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험준한 곳에 위치한 바위에 이름을 새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본 금강산만 아니라 속리산, 가야산, 천마산, 묘향산 등 연암이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혀 면식이 없던 연암에게 김홍연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집요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연암은 경개 좋은 산천에 이름자를 새겨 후세에 남기려는 자들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런 속내는 도입부에서 “크게 쓰고 깊이 새겨진 것이 조그마한 틈도 없어 마치 구경판에 어깨를 포개 선 것 같고 교외의 총총한 무덤과 같았다.”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다. 빈틈없이 채워진 각자(刻字) 행위는 장터 구경꾼들의 포개진 어깨와 다를 바 없고, 아무리 깊게 새긴들 그것은 이미 죽은 무덤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으로 읽힌다. 이름이란 세상 사람이 불러야 남는 것이지, 자신이 불러서야 남길 수 없다는 걸 연암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이런 연암이 외지고 깊숙한 곳을 올라 “세상 사람들이 오지 못한 곳을 나만이 왔노라”고 자부할 때마다 김홍연이란 이름이 나타났으니, “홍연이 어떤 작자길래 이다지도 당돌한가?”라고 욕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김홍연에 대한 연암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된다. “천지신명께 속으로 빌”면서 “돌아가지 못할까 벌벌 떨며 두려워하기도 하는” 그런 곳에서, ‘늙은 나뭇가지’와 ‘해묵은 칡덩굴’ 사이로 그의 이름이 나타날 때면 “옛 친구를 만난 듯 기뻤으며, 그로 인해 힘을 내어” 올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허명이나 남기려는 듯 이름자가 나타는 데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아주 높고 험준한 곳에서도 나타나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있음’을 증명해 주면서 오히려 연암을 위로했던 것이다. 험준한 산을 ‘벌벌 떨면서’ 올라가는 연암의 내면과 바로 그런 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김홍연의 마음이 어떤 동질감을 형성해 나가는 대목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김홍연은 실제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다. 다만 항간에 떠도는 정보에 따르면 그는, (1)검사(劍士)나 협객의 부류와 같은 왈짜였다는 것, (2)젊은 시절에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해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 (3)힘이 장사여서 능히 호랑이를 죽일 만했다는 것, (4)벼슬 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5)집이 부자여서 돈 쓰기를 더러운 흙 같이 했다는 것, (6)고금의 법서, 명화, 칼, 거문고, 이기(彝器), 화초를 모으는 컬렉터였다는 것, (7)준마와 이름난 매를 늘 좌우에 두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늙어 백발이 되어 송곳과 끌을 들고 이름을 손수 돌에다 새기고 있다.


 무과에 급제할 정도의 실력과 호랑이를 죄어 죽일 정도의 힘, 거기에 재력까지 갖춘 인물이 무슨 사연으로 다 늙어 위험천만한 산속 바위에 이름을 새기며 돌아다니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무과에 급제했다’는 정보와 ‘벼슬 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는 대목을 통해 김홍연의 현재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실력이 충분했지만 벼슬을 얻지 못한 어떤 사람이었다. 김홍연은 실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바위에 이름을 새김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실력은 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일까.


 역시 연암은 답을 주지 않고, 항간의 정보를 전달한 사람과 주고받은 대화를 이어간다.     

(자신의 이름을 손수 돌에다 새겼다는) “이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김홍연이오.”

“이른바 김홍연은 누구요?”

“자가 대심(大深)이지요.”

“대심이란 누구요?”

“발승암(髮僧菴)이라 자호(自號)하는 사람이오.”

“이른바 발승암은 누구요?”

얘기하던 사람이 답이 막히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화의 드러난 뜻은 간단해 보이지만, 전후 문맥 속에서 살펴보면 매우 심도 깊은 사유가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여전히 연암은 김홍연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고, 오직 산속 바위에 새겨진 이름과 지인으로부터 들은 정보로 파악할 뿐이다. 그러니 연암은 김홍연이라는 이름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혹은 실체가 무엇인지 반복해서 물었다. 상대방도 (1)김홍연이오, (2대심이지요, (3)발승암이라 자호하는 사람이오라며 세 번이나 답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연암이 알고자 하는 ‘이 사람’의 완전한 실체가 아니었다. 본명과 자와 호는 모두 이름이지만 그 사람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 이름이란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을 완전히 표현하는 수단일 수 없다는 것이다.


 대화 말미에 연암이 웃으며 말한 것은, 사마상여(BC 179~BC 117, 자는 長卿)의 「유렵부(遊獵賦)」에 나오는 무시공(無是公, ‘있지 않음’ 공)과 오유선생(烏有先生, ‘어찌 있겠는가’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세월이 흐르면 이름이란 모두 오유선생처럼 희미하게 산일되고 말 것이므로 ‘발승암’ 또한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이어서 「극진미신(劇秦美新)」의 작자를 송나라 왕안석(1021~1086)은 양자운(揚雄)이 아니라 곡자운(谷永)이라 변증했으나, 동시대의 소식(蘇軾, 1036~1101)은 “양자운이란 인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했다고 인용했다. 역사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의심한다는 말로써 이름의 허망함을 강조했다.


 글의 도입부에서 연암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김홍연이라는 이름에 화가 나서 욕도 했다. 하지만 험한 산중에서 만난 그 이름 때문에 힘을 내어 무사히 등정을 마치고는 어떤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연암은 김홍연에 대한 태도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이름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나 연암은 평양에서 드디어 그를 우연히 만났다. 누가 그를 가리키며 알려주었기에 “대심(大深), 그대가 발승암이 아닌가?”라고 먼저 물었다. 이때 김홍연은 “몹쓸 병에 온몸이 훼손되고 늙은 몸에 아내도 없어 늘 불당에 의지하고 살”고 있다고 말하며, 머리털(髮) 난 자가 스님들의 암자(僧菴)에 의지해 살아서 그렇게 자호했다고 밝힌다. 그런 그에게서 연암은 옛날의 기질이 아직도 남은 것이 있었으므로 젊은 그를 보지 못한 게 애석하다고까지 했다.


 앞서 풍설로 들었던 김홍연의 모습과 9년 후 실제로 마주한 그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지만, 연암은 초라한 그에게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을 통해서 과연 이 사람이 젊었을 때 가졌을 배포와 힘을 느꼈던 모양이다.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김홍연을 애석하게 여기는 연암의 마음은 깊은 연민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대의 글에 의탁하여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기를 원하오.”라는 김홍연의 부탁이 결코 마뜩할 수는 없었지만, 응해 주었던 것이다.


 젊은 날 김홍연의 출중한 실력은 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을까. 이제 늙고 병들어서도 허명이나 좇는 그를 연암은 왜 애석해 했을까. 연암은 김홍연의 실력과 현실의 불일치 혹은 모순된 결과에 공감한 것이 아닐까. 「주영렴수재기」의 양군 인수와 같이 김홍연도 개성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회적 굴레에 갇혔던 인물이다. 실력과 무관하게 장래가 차단된 사람, 그런 점에서 김홍연도 연암과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연담도 친구 이희천(1738~1771)의 허망한 죽음을 목도하고 과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선비로서 과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입신양명의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기에 더없이 가혹한 상실감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암 또한 그런 처지였기에 김홍연의 부탁을, 그것도 아주 뛰어난 문장으로 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를 위해 게(偈)까지 설하였다. 게란 원래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미하는 시를 말하는데, 연암은 그 형식을 따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내용은, 김홍연은 세상의 기준과 달리 살았기에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릇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까마귀나 해오라기는 저마다 자기들 기준으로 검은 색과 흰 색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눈이 두 개라는 것도 『산해경』에 나오는 일목국(一目國)이나 불교의 대자재천(大自在天)의 세 눈(頂門眼)이 있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인식과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차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암의 이런 상대주의적 생각은 매우 현대적인 평등관에 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발승암기」는 그 자체로 “붓이 춤을 추고 먹 방울이 뛰노는” 신필의 문장력이지만, 그 사유가 담고 있는 현대성 또한 놓칠 수 없는 작품으로 보인다.



[번역문]

  내가 동쪽으로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할 때 그 동구(洞口)에 들어서자마자 옛사람과 지금 사람들이 이름을 써 놓은 것이 보였는데, 크게 쓰고 깊이 새겨진 것이 조그마한 틈도 없어 마치 구경판에 어깨를 포개 선 것 같고 교외의 총총한 무덤과 같았다. 오래 전에 새긴 글씨가 겨우 이끼에 묻히자 새 글씨가 또 인주(印朱)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무너진 벼랑과 갈라진 바위에 이르니 깎아지른 듯 천 길이나 높이 서 있어, 그 위에는 나는 새의 그림자조차 끊겼는데도 홀로 ‘김홍연(金弘淵)’이란 세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실로 맘속으로 이상히 여기고, ‘자고로 관찰사의 위세는 족히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으며, 양봉래(楊蓬萊)는 기이한 경치를 좋아하여 그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거늘, 저 이름 써 놓은 자가 도대체 누구기에 석공(石工)을 시켜 다람쥐,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했단 말인가?’라 했다.

  그 후에 나는 국내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남으로는 속리산, 가야산에 오르고, 서로는 천마산, 묘향산에 올랐다. 외지고 깊숙한 곳에 이를 때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오지 못한 곳을 나만이 왔노라고 스스로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나 노상 김(金)이 써 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화가 치밀어,

  “홍연이 어떤 작자길래 이다지도 당돌한가?”

  라고 욕을 했다.

  무릇 명산에 노닐기를 좋아하는 자는 지극한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어려움을 물리치지 않으면 절경을 찾아낼 수 없다. 나 또한 평상시 지난날의 발자취를 추억할 때면 벌벌 떨면서 스스로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산에 오르게 되면 전번의 다짐이 어느새 온데간데없어지고 험준한 바위를 딛고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썩은 잔교(棧橋)와 앙상한 사닥다리에 몸을 의지하기도 한다. 왕왕 천지신명께 속으로 빌면서 오히려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벌벌 떨며 두려워하기도 하는데, 그런 곳에서도 사슴 정강이 크기만 한 큰 글자가 인주로 메워져 늙은 나뭇가지와 해묵은 칡덩굴 사이로 보일락말락 서려 있다 하면 반드시 ‘김홍연(金弘淵)’ 석 자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도리어 마치 위험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 옛 친구를 만난 듯 기뻤으며, 그로 인해 힘을 내어 기어 올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평소에 김(金)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은 바로 왈짜(원문은 ‘濶者’인데, 왈짜(曰者)ㆍ왈패(曰牌)라고도 부르는 무뢰배를 말한다.)인데 왈짜란 대개 항간에서 방탕하고 물정 모르는 자를 일컫는 말로서 이른바 검사(劍士), 협객(俠客)의 부류와 같소. 그는 젊은 시절에 말달리기,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했고 힘도 능히 호랑이를 죄어 죽일 만하며, 기생 둘을 양옆에 끼고 두어 길 되는 담장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오. 녹록하게 벼슬 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집이 본래 부유해서 돈 쓰기를 더러운 흙같이 하였다오. 고금의 법서(法書), 명화(名畵), 칼, 거문고, 이기(彝器, 고대에 종묘 제사에서 사용하던 종정(鍾鼎) 류를 이른다.) 기이한 화초들을 널리 수집하여 한번 맘에 드는 것을 만나면 천금도 아끼지 않았으며, 준마(駿馬)와 이름난 매가 늘 그의 좌우에 있었지요. 이제는 늙어서 백발이 되자 송곳과 끌을 주머니에 넣고 명산을 두루 노닐어 이미 한라산(漢拏山)을 한 번 들어갔고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을 두 번이나 올랐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손수 돌에다 새겼으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하오.”

  나는 물었다.

  “이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김홍연이오.”

  “이른바 김홍연은 누구요?”

  “자가 대심(大深)이지요.”

  “대심이란 누구요?”

  “발승암(髮僧菴)이라 자호(自號)하는 사람이오.”

  “이른바 발승암은 누구요?”

  얘기하던 사람이 답이 막히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에 장경(長卿)*이 무시공(無是公)과 오유선생(烏有先生)을 설정하여 서로 힐난하게 한 바 있었소. 지금 내가 그대와 함께 오래된 암벽과 흐르는 물 사이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문답을 하고 있으니, 훗날에 서로 생각해 보면 모두 오유선생이 될 터인데 이른바 발승암이란 게 어디 있겠소?”

* 장경 : 장경은 전한 때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는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무시공(無是公)과 오유선생(烏有先生)은 그가 지은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에 나오는 가공 인물들이다.


  그가 발끈해서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내가 어찌 황당한 말로 꾸며 내었겠소? 이 사람은 정말로 있었소.”

  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너무나 집요하군. 옛날 왕개보(王介甫 왕안석(王安石)가 극진미신(劇秦美新)**이란 작품을 변증(辨證)하여, 틀림없이 곡자운(谷子雲)***의 저작이지 양자운(揚子雲)****의 저작이 아니라 했고,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서경(西京 장안(長安))에 과연 양자운이란 인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했소. 무릇 이 두 사람의 문장이 당대에 빛났고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지만 후세에 옛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와 같은 의심을 가졌거늘, 하물며 심산궁곡 중에 헛된 명성을 남겨 바람에 삭고 비에 부스러져 백 년이 못 가서 마멸되는 것에 있어서리오.”

** 극진미신 : 왕망(王莽)이 한 나라 황실을 몰아내고 신(新) 나라를 세우자 양웅(揚雄)이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봉선문(封禪文)을 모방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도량형을 통일한 진(秦) 나라 시황(始皇)을 비판하고 새로 들어선 신(新) 나라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지은 글이다. 《文選 卷48》

*** 곡자운 : 자운은 곡영(谷永)의 자이다. 경서(經書)에 해박하고 특히 천문(天文)에 정통하였다. 전한 원제(元帝) 때에 태상승(太常丞)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천재지변의 현상을 가지고 조정의 득실을 논하였고, 성제(成帝) 때에는 황태후를 비롯해 외척 왕씨(王氏)들과 가까이 지낸 탓에 성제로부터 경계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와 몇 달 후 사망하였다. 곡영이 사망한 해는 성제의 치세인 기원전 8년으로, 왕망이 신 나라를 세운 기원후 8년과는 16년의 차이를 보인다.
**** 양자운 : 자운은 양웅(揚雄)의 자이다. 학문에 다방면으로 밝았으며 특히 사부(辭賦)에 뛰어났다. 왕망이 신 나라를 세우자 대부(大夫)가 되었고, 왕망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올려 후대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위의 곡영(谷永)과는 동일한 자(字)를 사용하고 활동한 시대가 겹쳐 있으며 왕망의 일파와도 가깝게 지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말을 듣고 그 또한 크게 웃고 떠나갔다.

  이로부터 9년 후에 나는 평양에서 김을 우연히 만났다. 뒤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이가 김홍연이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그의 자를 부르면서,

  “대심(大深), 그대가 발승암이 아닌가?”

  하였더니, 김군이 고개를 돌려 뚫어지게 보더니 말했다.

  “그대가 나를 어떻게 아오?”

  “옛날에 만폭동(萬瀑洞)에서 벌써 그대를 알았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옛날 모은 것을 지금도 꽤 가지고 있는가?”

  김군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이 가난하여 다 팔아넘기고 말았소.”

  “왜 발승암이라 부르는가?”

  “불행히도 몹쓸 병에 온몸이 훼손되고 늙은 몸에 아내도 없어 늘 불당에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오.”

  그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매 옛날의 기질이 아직도 남은 것이 있었으니, 내가 그의 젊었을 때를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

  하루는 그가 내가 묵고 있던 집으로 찾아와서 청했다.

  “내가 이제 늙어서 다 죽게 되었소. 마음은 벌써 죽고 터럭〔髮〕만 남았으며, 거처하는 곳은 모두 승암(僧菴)이오. 그대의 글에 의탁하여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기를 원하오.”

  나는 그가 늙어서도 자신의 포부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여겨, 드디어 예전에 유람 중에 만났던 사람과 문답한 것을 써서 돌려주고 또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이 게(偈)를 설하였다.     


까마귀는 새마다 검은 줄 믿고     烏信百鳥黑

해오리는 딴 새가 희지 않음을 의아해하네   鷺訝他不白

검은 놈 흰 놈이 저마다 옳다 여기니    白黑各自是

하늘도 그 송사에 싫증나겠군     天應厭訟獄

사람은 다 두 눈이 달려 있지만     人皆兩目俱

애꾸는 눈 하나로도 능히 보는걸    矉一目亦覩

어찌 꼭 쌍이라야 밝다 하리오     何必雙後明

어떤 나라 사람은 한 눈뿐이네*     亦有一目國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불만족하여    兩目猶嫌小

이마에 덧눈을 달기도 하고**     還有眼添額

더더구나 저 관음보살은     復有觀音佛

변상도(變相圖)에 눈이 천 개나 되네    變相目千隻

달린 눈이 천이랬자 별거 있겠나    千目更何有

소경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는데     瞽者亦觀黑

김군은 불구의 몸으로      金君廢疾人

부처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네     依佛以存身

돈 쌓아 놓고 쓸 줄 모른다면     積錢若不用

비렁뱅이 가난과 뭐가 다르리     何異丐者貧

중생은 다 제멋으로 사는 법     衆生各自得

애써 본뜰 건 없지 않은가     不必强相學

대심은 중생과 달리했기에     大深旣異衆

이로써 서로들 의심한 게지     以玆相訝惑     


* 《산해경(山海經)》 해외북경(海外北經)에 일목국(一目國)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외눈이 얼굴 한복판에 있다고 하였다.
** 불교에서 대자재천(大自在天)은 보통 사람과 같은 두 눈 외에 정수리에 일체의 사리를 꿰뚫어 보는 외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를 정문안(頂門眼)이라 한다.


[평어]

  세상에서 못내 명예를 좋아하여 외물에 의탁해서 불후(不朽)를 도모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였으니, 그들은 이 글을 보면 망연자실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붓이 춤을 추고 먹방울이 뛰노니 《시경》의 이른바 “북소리 두둥둥 울리거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창을 겨룬다〔擊鼓其鏜 踴躍用兵〕”는 것이 아마 이를 두고 이름인저.     

  게어(偈語)는 특히 원오경발(圓悟警發)하다.     

  영감게(靈感偈)나 나한찬(羅漢贊)의 사이에 두어도 어느 것이 옛 글이고 어느 것이 요새 글인지 알지 못하겠다.               


[원문]

髮僧菴記      

余東遊楓嶽。入其洞門。已見古今人題名大書深刻。殆無片隙。如觀場疊肩。郊阡叢墳。舊刻纔沒苔蘚。新題又煥丹硃。至崩崖裂石。削立千仞。上絶飛鳥之影。而獨有金弘淵三字。余固心異之曰。古來觀察使之威。足以死生人。楊蓬萊之耽奇。足跡無所不到。猶未能置名此間。彼題名者誰耶。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其後余遊歷方內名山。南登俗離,伽倻。西登天摩,妙香。所至僻奧。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然常得金所題。輒發憤罵曰。何物弘淵。敢爾唐突耶。大凡好遊名山者。非犯至危排衆難。亦不得搜奇探勝。余平居追思往䠱。未甞不慄然自悔也。然而復當登臨。猶忽宿戒。履巉巖。俯幽深。側身于朽棧枯梯。往往默禱神明。惴惴然尙恐其不能自還。而大字硃塡。如鹿脛之大。隱約盤挐於老槎壽藤之間者。必金弘淵也。乃反欣然如逢舊識於險阨危困之際。爲之出力而扳援先後之也。或有素知金行跡爲道。金乃濶者。葢閭里間浪a252_026c蕩迂濶之稱。如所謂釖士俠客之流。方其少年時。善騎射。中武科。能力扼虎。挾兩妓。超越數仞牆。不肯碌碌求仕進。家本富厚。用財如糞土。傍蓄古今法書名畵。劒琴彛器。奇花異卉。遇一可意。不惜千金。駿馬名鷹。動在左右。今旣老白首。則囊置錐鑿。遍遊名山。已一入漢挐。再登長白。輒手自刻石。使後世知有是人云。余問是人爲誰。曰金弘淵。所謂金弘淵爲誰。曰字大深。曰大深者誰歟。曰是自號髮僧菴。所謂髮僧菴誰歟。談者無以應。則余笑曰。昔長卿設無是公烏有先生以相難。今吾與子。偶然相遇於古壁流水之間。相答問焉。他日相思。皆烏有先生也。安有所謂髮僧菴者乎。客勃然怒於色曰。吾豈謊辭而假設哉。果眞有是人也。余大笑曰。君太執拗。昔王介甫辨劇秦美新。必谷子雲所著。非楊子雲。蘇子瞻曰。未知西京果有楊子雲否也。夫二子之文章。烟蔚當世。流名史傳。而後之尙論者。猶有此疑。而况寄空名於深山窮壑之中。而風消雨泐。不百年而磨滅者乎。客亦大笑而去。其後九年。余遇金平壤。有背指者。此金弘淵也。余字呼曰大深。君豈非髮僧菴耶。金君回顧熟視曰。子何以知我。余應之曰。舊已識君於萬瀑洞中矣。君家何在。頗存舊時所蓄否。金君憮然曰。家貧賣之盡矣。何謂髮僧菴。曰不幸殘疾形毁。年老無妻。居止常依佛舍。故稱焉。察其言談擧止。舊日習氣猶有存者。惜乎。吾未見其少壯時也。一日詣余寓邸而請曰。吾今老且死。心則先死。特髮存耳。所居皆僧菴也。願托子文而傳焉。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且爲之說。偈曰。

烏信百鳥黑。鷺訝他不白。白黑各自是。天應厭訟獄。人皆兩目俱。矉一目亦覩。何必雙後明。亦有一目國。兩目猶嫌小。還有眼添額。復有觀音佛。變相目千隻。千目更何有。瞽者亦觀黑。金君廢疾人。依佛以存身。積錢若不用。何異丐者貧。衆生各自得。不必强相學。大深旣異衆。以玆相訝惑。     

警世之切切然好名。托物以圖不朽者。觀此文。未有不憮然自喪。筆舞墨跳。詩云擊鼓其鏜。踴躍用兵。其此之謂歟。

偈語。尤圓悟警發。

寘之靈感。偈羅漢贊之間。未知孰古孰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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