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17)
"공동체의 항구적 안녕을 위한 역설과 풍자"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 살다 세상을 떠난다. 공동체는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인간의 생존 조건이면서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인간을 태어나게 하고 기르고 가르쳐 살아가게 하는가 하면, 불가피하게 관계와 소통의 고난이도 작업을 강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공동체 자체의 항구성과 안녕을 추구한다. 난숙하고 노련한 관계와 소통의 대가들은 자신들의 생존 조건만 개선하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질서와 결속을 강화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멀리 주나라 주공의 분봉(分封) 원칙이었던 친친(親親) 관계도 근본적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꿈꾼 공동체주의의 발로라 할 수 있으며, 가까이 선귤자(蟬橘子)*가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엄 행수’(嚴行首)를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 부르며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도 올바른 공동체를 지향하는 ‘깨달은 자’의 역설적 언행**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는 통념을 깨는 역설은 있되 파괴적이지 않으며, 허위와 가식에 대한 가차 없는 풍자는 있되 맹목적이지 않다.
* 선귤자(蟬橘子) :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 인물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이덕무의 자는 무관(懋官)인데 호는 이밖에도 청장관(靑莊館)•아정(雅亭)•형암(炯庵)•동방일사(東方一士) 등도 사용했다. 조선 제2대왕 정종(定宗)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이다. 박학다식하였으며 개성이 뚜렷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서출이라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청나라에 가서 학문을 닦고 돌아와 북학(北學)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박제가•이서구•유득공과 함께 사가(四家)라 부른다. 저서에 『청장관전서』가 있다.
** 역설적 언행 : 세속의 통념에 따르면 ‘똥 푸는 자’를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도 역설적이지만,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는 호칭의 ‘穢’(더러울 예) 자와 ‘德’ 자의 조합 자체가 우선 역설적이다.
세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세간의 통념을 깨는 통찰과 사회적•시대적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선귤자가 나온다. 또 욕망을 버린 채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며 가식 없는 성실한 생활로 선귤자로부터 예덕선생으로 호칭되는 엄 행수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사대부로서 지배층의 통념에 갇혀 허위와 가식의 모순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자목(子牧)이 나온다. 세 인물의 전형적인 성격은 「예덕선생전」의 구성적 특질을 형성한다. 선귤자와 자목이 대칭적 극단에 위치한다면, 엄 행수는 그 사이에서 가치론적 중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작품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선귤자와 자목은 「예덕선생전」의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가는 대화의 두 주체이다. 자목이 묻고 선귤자가 답하고, 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자목이 “귀를 막고 뒷걸음질 치며” 다시 말하고 그에 선귤자가 길게 답하는 것이 작품의 대강이다. 엄 행수는 이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의 성품과 행동은 선귤자에 의해 해석된 대로 나타난다. 엄 행수는 선귤자나 자목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일종의 액자 속의 인물인 셈이다. 이처럼 「예덕선생전」은 전형적인 세 유형의 인물을 통해 작가의 주장을 전달하고자 한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주제의식을 표출하는 현대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고 해서 「예덕선생전」의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공동체의 항구적 안녕을 위한 역설과 풍자의 통렬함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서사적 성격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현대 소설의 모든 구성적•기법적 특성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양식의 보수성이 창조의 혁신성을 결코 막아설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의 형식에서도 언제나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예술과 문학의 세계에서 필연적인 것은 없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예덕선생전」의 구성적 특성상 엄 행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선귤자의 발언에 주목해야 한다. 엄 행수는 어떤 사람이기에 선귤자에 의해 예덕선생으로 호칭되었으며, 심지어 스승으로 모심을 받은 것일까. 여기에 주목하는 것은 곧 연암의 작의(作意)를 파악하는 길이 될 터이다.
(1)자신을 알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2)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
(3)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한다.
(4)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간다.
(5)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다.
(6)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다.
(7)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한다.
(8)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한다.
(9)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엄 행수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지도 않고 부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맛난 음식을 찾지도 반반한 옷을 입지도 않고 ‘일에만 열중’할 뿐이다.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는 엄 행수의 순명의 삶은 선귤자에 의해 마침내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으로 칭송된다. 엄 행수의 처지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이를 두고 대은이다 예덕선생이다 하면서 상찬하는 게 과도한 느낌까지 준다.
*** 대은(大隱) : 한(漢) 나라 때의 동방삭(東方朔)이나 위진(魏晉)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中隱」이라는 시에 “大隱住朝市 / 小隱入丘樊”라는 구절이 있다. 진짜 큰 은자는 조정(朝廷)과 시장통에 살고, 작은 은자는 세상을 떠나 구릉 너머 울타리 속에 숨어든다는 뜻이다.
평생 똥장군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엄 행수와 같이 욕심을 버린 채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며 가식 없이 살아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신분제의 장벽에 갇힌 엄 행수의 생활을 세속에서도 진정한 은자의 삶을 구현하는 대은으로 극찬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 탐욕과 권력욕으로 공동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일은 역사상 끊이지 않고 발생해 왔다. 때문에 선귤자는 『중용』과 『시경』을 인용하며 운명을 따르고 분수를 지키는 삶을 강조하면서 엄 행수의 태도를 상찬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네. 『시경』(詩經)에,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所)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으니, 명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으랴.”
- 박지원, 「예덕선생전」 중에서
엄 행수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본분에 충실한 만큼 선귤자의 제자인 자목도 그런 사람인가. 비록 자목은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 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라면서 엄 행수의 덕을 칭송하는 스승을 떠나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사대부로서 지켜야 할 본분을 벗어나 탐욕과 권력욕에 탐닉하는 인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가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비천한 막일꾼’이라며 엄 행수를 힐난하지만 그것은 예나 이제나 엄연한 사실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며 어느 경우에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게 오늘날의 상식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선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목은 스승과 달리 엄 행수의 생활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지 깨닫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사대부로서의 통념 속에 갇힌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선귤자는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겠다면서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준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면서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자목에게는 선비로서의 학문 도야와 경세의 능력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신분제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통념적 가치관과 처세가 있다. 그가 비난한 대로 ‘시정잡배나 하인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양반의 법도와는 상이할지언정 그것은 오직 잇속에만 투철한 공소한 양반의 처세보다 진실하고 생산적이라는 점을 자목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사회적•시대적으로 반동적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혁명적 인물도 아니다. 그래서 선귤자는 엄 행수의 삶을 통해 더욱 끈질기게 가르치려 드는지 모른다.
자목과 같은 선비에게 요구되는 처세의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 연암은 「마장전」(馬駔傳)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여준다. 등장인물인 송욱(宋旭)의 입을 통해 ‘남과 더불어 교제하는 다섯 가지 방법’과 ‘사귀는 세 가지 방법’을 상세히 제시했다. 또 그 뒤에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처세(處世)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여 당시 사대부 계층 사이에 통념화된 처세술임을 보여주었다.
「마장전」에 기록된 ‘남과 더불어 교제하는 세 가지 방법’은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등이다. 모두 상대가 특정되지 않은 범칭(泛稱)의 ‘남’과 교제하는 방법이다.
‘남과 더불어 사귀는 다섯 가지 기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다섯째,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이처럼 정교한 처세의 방법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있다는 뜻이다. 「예덕선생전」의 자목이 스승과 달리 통념적 인물이라면, 이와 같이 부차적 요소인 처세가 일차적 요소인 학문과 경세를 넘어서는 지경(地境)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한 데 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라며 타이른 것이다.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 박지원, 「예덕선생전」 중에서
연암은 선귤자를 통해 본분을 지키며 지극히 성실히 살아가는 엄 행수의 삶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처세에 매달리며 선비 정신을 망각한 지배층에 대해 통렬한 풍자의 화살을 날렸다. 연암은 비록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해 신분제 자체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허상이 아니라 실상을, 허식이 아니라 실질을 중시하는 사상적 입장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엄 행수를 천한 막일꾼으로 취급하며 홀대하지만, 그가 져 나르는 똥만은 상상전(上上田)****의 채소를 키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거름이다. 모두가 더럽다며 피하지만 또한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똥이야말로 연암에게는 실상이자 실질이다. “왕십리의 무와 살곶이〔箭串, 오늘날 뚝섬〕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오이•수박•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마늘•부추•파•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에 심는데, 모두 엄 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錢 600냥)이나 된다네.”*****
**** 상상전(上上田) : 상상전은 최상급의 토지를 말한다.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은 1444년(세종 26)부터 실시한 조세 부과의 기준으로 조선시대의 공법 전세제(貢法田稅制)에서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지역 단위로 수세하던 일종의 정액세법이다. 토지를 상•중•하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상•중•하로 나누어 모두 9등급을 두었다.
***** 연암 박지원을 이용후생을 중시한 북학파 실학의 태두로 부르는데, 여기서 서울 각 지역별 재배 작물과 그 1년 수입을 구체적인 액수로 제시한 점 등을 통해서도 그의 실용적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엄 행수는 남들이 모두 더러운 일이라 피하는 똥장군 져 나르기를 통해 묵묵히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연암은 바로 이점을 투철하게 인식한 사람이다. 누구든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예덕선생 엄 행수만 못한 사람이고, 어떤 경우에도 실상과 실질은 중시되어야만 공동체는 항구적인 안녕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 박지원, 「예덕선생전」 중에서
[번역문]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이란 이같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그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자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서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선생님께서는 자주 그의 덕(德)을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는 동시에 장차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할 것같이 하시니 제자로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러하오니 문하에서 떠나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마. 속담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 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 남들이 몰라주면, 답답해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고 싶은 체한다. 그럴 때 예찬만 늘어놓는다면 아첨에 가까워 무미건조하게 되고, 단점만 늘어놓는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 같아 무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변죽만 울리고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크게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니, 상대방의 꺼림칙한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준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등을 토닥일 때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어루만질 때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벗을 사귄다면 좋겠느냐?”
하였다. 자목은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며 말하기를,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
하니,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전자에는 있지 않고 후자에만 있구나.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ㆍ오이ㆍ수박ㆍ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ㆍ마늘ㆍ부추ㆍ파ㆍ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錢 600냥 )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네. 《시경(詩經)》에,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所)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으니, 명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으랴. 그런데 새우젓을 먹게 되면 달걀이 먹고 싶고 갈포옷을 입게 되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천하가 이로부터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고 농토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지. 진승(陳勝)ㆍ오광(吳廣)ㆍ항적(項籍)의 무리들은 그 뜻이 어찌 농사일에 안주할 인물들이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짐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불러들일 것이다.’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 그런 까닭에 사람이 죽었을 때 입속에다 구슬을 넣어 주어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았음을 나타내 주는 걸세.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이상을 통해 나는 깨끗한 가운데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서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네. 나는 먹고사는 일에 아주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었지. 진실로 마음속에 좀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엄 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면 성인(聖人)의 경지에도 이를 것일세.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하였다.
[원문]
穢德先生傳
蟬橘子有友曰穢德先生。在宗本塔東。日負里中糞。以爲業。里中皆稱嚴行首。行首者。役夫老者之稱也。嚴其姓也。子牧問乎蟬橘子曰。昔者。吾聞友於夫子曰。不室而妻。匪氣之弟。友如此其重也。世之名士大夫。願從足下遊於下風者多矣。夫子無所取焉。夫嚴行首者。里中之賤人役夫。下流之處而恥辱之行也。夫子亟稱其德曰先生。若將納交而請友焉。弟子甚羞之。請辭於門。蟬橘子笑曰。居。吾語若友。里諺有之曰。醫無自藥。巫不己舞。人皆有己所自善而人不知愍然。若求聞過。徒譽則近諂而無味。專短則近訐而非情。於是泛濫乎其所未善。逍遙而不中。雖大責不怒。不當其所忌也。偶然及其所自善。比物而射其覆。中心感之。若爬癢焉。爬癢有道。拊背無近腋。摩膺毋侵項。成說於空而美自歸。躍然曰知如是而友可乎。子牧掩耳卻走曰。此夫子敎我以市井之事。傔僕之役耳。蟬橘子曰。然則子之所羞者。果在此而不在彼也。夫市交以利。面交以諂。故雖有至懽。三求則無不踈。雖有宿怨。三與則無不親。故以利則難繼。以諂則不久。夫大交不面。盛友不親。但交之以心。而友之以德。是爲道義之交。上友千古而不爲遙。相居萬里而不爲疎。彼嚴行首者。未甞求知於吾。吾常欲譽之而不厭也。其飯也頓頓。其行也伈伈。其睡也昏昏。其笑也訶訶。其居也若愚。築土覆藁而圭其竇。入則蝦脊。眠則狗喙。朝日煕煕然起。荷畚入里中除溷。歲九月天雨霜。十月薄氷。圊人餘乾。皁馬通。閑牛下。塒落鷄。狗鵝矢。笠豨苓。左盤龍。翫月砂。白丁香。取之如珠玉。不傷於廉。獨專其利。而不害於義。貪多而務得。人不謂其不讓。唾掌揮鍬。磬腰傴傴。若禽鳥之啄也。雖文章之觀。非其志也。雖鍾皷之樂。不顧也。夫富貴者。人之所同願也。非慕而可得。故不羡也。譽之而不加榮。毁之而不加辱。枉十里蘿蔔。箭串菁。石郊茄蓏水瓠胡瓠。延禧宮苦椒蒜韭葱薤。靑坡水芹。利泰仁土卵。田用上上。皆取嚴氏糞。膏沃衍饒。歲致錢六千。朝而一盂飯。意氣充充然。及日之夕。又一盂矣。人勸之肉則辭曰。下咽則蔬肉同飽矣。奚以味爲。勸之衣則辭曰。衣廣袖不閑於體。衣新不能負塗矣。歲元日朝。始笠帶衣屨。遍拜其隣里。還乃衣故衣。復荷畚入里中。如嚴行首者。豈非所謂穢其德而大隱於世者耶。傳曰。素富貴行乎富貴。素貧賤行乎貧賤。夫素也者定也。詩云夙夜在公。寔命不同。命也者分也。夫天生萬民。各有定分。命之素矣。何怨之有。食蝦醢。思鷄子。衣葛羨衣紵。天下從此大亂。黔首地奮。田畝荒矣。陳勝,吳廣,項籍之徒。其志豈安於鋤耰者耶。易曰。負且乘致寇。至其此之謂也。故苟非其義。雖萬鍾之祿。有不潔者耳。不力而致財。雖埒富素封。有臭其名矣。故人之大往飮珠飯玉。明其潔也。夫嚴行首負糞擔溷以自食。可謂至不潔矣。然而其所以取食者至馨香。其處身也至鄙汚。而其守義也至抗高。推其志也。雖萬鍾可知也。繇是觀之。潔者有不潔。而穢者不穢耳。故吾於口體之養。有至不堪者。未甞不思其不如我者。至於嚴行首無不堪矣。苟其心無穿窬之志。未甞不思嚴行首。推以大之。可以至聖人矣。故夫士也窮居。達於面目恥也。旣得志也。施於四體恥也。其視嚴行首。有不忸怩者幾希矣。故吾於嚴行首師之云乎。豈敢友之云乎。故吾於嚴行首。不敢名之。而號曰穢德先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