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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Jul 25. 2023

암어 바비 걸

시선을 뺏겨버린 주제의식

페미니즘이 엘리트화 되어 있다고 해서, 진짜 어린이에게 곱씹어주듯 말할 필요가 있을까. 영구치가 나기 전에 제대로 음식을 씹어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음식을 형태도 모르게 으깨 주듯,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 그 음식의 본질이 될 수 있는 질감과 색상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린 모두 바비 인형을 하나씩 가져 본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바비 하급(?) 버전인 쥬쥬를 갖고 놀긴 했다)는 명제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여성의 주체성과 성적대상화의 시발점이 되는 바비의 중의성에 대해 말한다.

먼저, 여성에 대한 시각적 이중 잣대를 지적하는 영화라기엔 시각적 효과가 너무 강하다. 바비의 인형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핑크색이 천지인데, 핑크와 원색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가 본다면 멀미를 느낄 정도다. 영화가 지나치게 예쁘면 스토리가 변질 된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의 취향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영화는 바비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바비의 주인과 바비가 깊은 연대를 느끼면, 바비월드(바비들이 이룩한 세상)에 바비의 주인이 생각하는 대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주인의 비관적 생각으로 인형생(生) 에 균열이 생긴 바비(마고 로비)는 자신의 완벽한 ‘전형성’을 찾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떠난다.

인간의 세상은 인형 세상과는 반대다. 바비의 존재가 여성의 다양성과 주체성을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간 세상에서 바비는 우매한 남성들의 환상이 상품화된, 여성의 인권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한, 여성에 대한 ‘편견’ 덩어리 일 뿐이다. 반면, 인형 세상에서 늘 소외받던 ‘바비의 남자친구’켄(라이언 고슬링)은 남자들이 지배하는 인간 세상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힘을 깨닫고 인형 세상으로 돌아가, 바비가 이룩한 정치, 사회, 문화를 모두 깨부수고 가부장제를 전파한다.

이 영화에서 ‘바비’라는 여성의 상징물은 계몽의 대상이다. 한 번은, 켄으로부터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또 한 번은, 바비의 주인으로부터 여성에 대한 모순적이며 차별적인 시각을 깨닫고 가부장제를 타파하고자 한다. 텅 빈 플라스틱 인형에 ‘반복 학습’ ‘핵심 요약’을 통해 주체성을 주입한다. 여기서 영화가 반복적이고 쉽게(?) 던지는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관객을 머리가 텅 빈 ‘바비’ 취급한다는 감상이 든다. 후반부에서는 진정 ‘나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저 그런 주제의식을 끌고 가려고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뮤지컬 영화 ‘그리스’를 오마주한 듯한 어설픈 퍼포먼스로 부디 이 시퀀스가 빨리 끝나길 기다리게 한다.

캐스팅에서 인종과 성적지향의 다양성을 고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일 뿐, 오히려 그러한 인물들을 지나치게 부수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소외로 보이기도 한다. 한쪽으로도 치우치치 않으려 노력하다 결국 어느 한쪽도 만족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온듯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싸우지 말자고’ ‘너’ ‘나’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의미 있으니 전형적인 인간도, 전형성에서 벗어난 인간도 다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 싸우지 말자고 제안한다. 식상하지만 그 식상한 상식마저도 지켜지지 못하는 퇴화한 사회에선 결국, ‘반복 학습’과 ‘핵심 요약’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레타 거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상업 영화 데뷔가 반갑기도 아쉽기도 한 마음이다. 영화의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유머와 사랑스러움만은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 있어 마냥 미워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엄격한 판단자(者)인 여성이, 여성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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