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스필만은 폴란드 국영 라디오에서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로 폴란드에서 피아니스트로 유명세를 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들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면서 모든 상황이 뒤바뀐다.
유대인은 인도로 걷지 못하고 배수로로 걸어야 한다. 외출 시 반드시 팔에 완장을 차야 한다.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의 양도 제한한다. 스필만네 6 가족은 굶주림에 허덕이다 결국 스필만의 피아노를 헐값에 팔아넘기기에까지 이른다.
결국 유대인들을 모두 말살시키려는 나치의 계획에 따라 유대인들의 일부 지역에 봉쇄되고 스필만의 가족들도 그 지역에서 생명을 부지한다. 그러다 결국 가족을 잃게 된 스필만.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만, 이내 지인들과 유대인을 돕는 폴란드인들의 도움으로 생존할 거주지와 음식을 공급받는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숨어 지낸 세월이 길어지며 스필만은 제대로 피아노 한 번 연주해보지 못한다. 그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놀리며 쇼팽의 곡을 연주할 뿐이다.
윌름 호센펠드 역의 배우와 실존 인물
그런 그가 한번 제대로 된 연주를 펼치게 된다. 바로 독일군 장교 앞에서. 윌름 호센펠드라는 독일군 장교는 다락에 숨어 지내는 스필만을 발견하곤 당신은 무엇을 하던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러니 스필만이 자신은 피아니스트였다고 답하고 호센펠드는 연주를 요구한다.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은 호센펠드는 스필만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며 그의 은신처를 숨겨준다. 그의 코트를 벗어주기까지 한다. 종전 후에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혀 들어가 역으로 스필만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그의 이름을 스필만이 알 길이 없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것을 스필만은 평생의 미안함으로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숨어 지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종전을 맞은 폴란드. 스필만은 다시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연주하고 무대에도 선다. 그리고 폴란드에서 2000년까지 생존했다고 한다.
도망치는 것과 도망치지 않는 것의 간극에는 지독한 생존본능이 깔려있다. 그 지독함을 짓밟을 수 있는 잔혹함과 생존본능에 절여져 나 자신을 파괴해 가는 과정을 스스로 목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 전쟁 속에선 승자와 패자가 번갈아 역할을 수행하며, 생존본능을 이겨내고 남길 선택한 자들을 우린 영웅이라 부른다.
여기서 이겨냄은 비겁하게 자신의 생존에만 집착했는가, 혹은 자신의 생존의 여부와 관계없이 대의를 위했는가로 나뉠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우린 이 구분을 혼동하기 쉬우며 역사는 그 혼동을 왜곡하고 누구는 전자를 누구는 후자를 신봉하고도 호도하며 우린 그렇게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전쟁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어쩐지 나에게 불분명하고 비겁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결국 살아남은 자들을 우린 모두 '영웅'이라 칠 수 있나. 그들을 모두 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추앙할 수 있나. 물론 전쟁이란 특수상황 아래의 선택들을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전쟁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기도 하다. 스필만이 음악으로서 저항했는가 굴복했는가는 나는 알 수 없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펜과 붓으로서 그러했는가는 역사적으로 각국에서 이어져오는 논쟁일 것이다. 그런 불분명함이 주제였다면 영화는 어느 정도 성공이지만, 어쩐지 한쪽 손을 세게 붙들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던 영화.
통창에서 시작해 작은 창, 깨진 틈새, 폭파된 벽 사이로 스필만의 시선이 점점 파괴된다. 전쟁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끝까지 관찰자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박탈감과 죄책감이 부디 예술로서 조금은 승화되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