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부모가 키울 때 오는 것
귀하의 아이는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
아이를 부모가 키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세상을 얼마 전까지 살고 있었다.
분업화된 사회 기능에서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을 맡았다.
세탁기가 개발되었을 때처럼, 여성들의 사회진출 기회가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부모와 떨어져 자라게 되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에 한두 시간, 저녁에 네다섯 시간, 혹은 저녁에도 한두 시간을 보는 가정들이 있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거의 보지 못할 정도로 보육과 교육시설을 전전하며, 아이들이 자라났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쟁에서 살아남고, 사회성을 기른다는 '목적'과 '불안함'이 사회적 요구로 투영되었고, 자본주의가 그 요구를 받아 물었다.
나의 아이들도 태어난지 각각 21개월과 12개월 차에 어린이집으로 분리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부모들은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래야 했고, 모두가 그렇다고 한다.
내 아내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이후에서야 못했던 운동도 하고 독서도 했다.
그리고 역병이 돌았다.
돌고 있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1월 말부터 해서 반년째 어미 품 안에서 지낸다.
배워오던 놀이나 숫자나 영어나 각종 교육은 끊겼고, 친구들은 없다. 형제인 게 다행이라지만 '사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기능은 발달하는데, 적절한 자극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 비슷한 게 꼬리를 쳤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만 놓고 관찰해보니 이야기가 다르다.
아이들은 인생 최장으로 아프지 않은 기간을 보내고 있고, 불안했던 표정은 밝아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 자식 간의 친밀도도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식비가 급증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정상'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야 지들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해봤을 때는 그랬다. 사교육은 없었지만, 목표가 있었고 혼자서 고민했던 시간이 쌓여 실력이 되었다.
사회성도 마찬가지이다. 결국엔 부모와의 신뢰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회성은 부모로부터 나온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를 부모가 키울 때 오는 것이 '진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끼고 지낼 수는 없겠지만, 역병이 선물한 소중한 시간을 이제라도 알아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아내는 좀 고생이지만, 분명 '이 시간이 가치 있었다'라고 세월이 증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