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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ttoo Jul 31. 2024

우리에게는 각자만의 속도가 있다.

ㅁ마라톤 하는 언니들


드디어 내 버킷리스트 중인 하나인 '마라톤에 참가하기'를 이루었다. 그나저나 '00등 안에 들기'도 아닌 '참가하기'라니. 조금 작고 소소하지만 귀여운 나의 목표. 게다가 42.195km 마라톤도 아니고, 제일 단계가 낮은 10km의 가짜(?) 마라톤이었으니 어쩌면 '너무 쉬운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말 '참가'만 한 것은 아니고 나 나름대로 기준이 있기는 했다.

절대 걷거나 멈추지 않기

4년 동안 꾸준히 뛰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속도가 달라지지 않게 같은 속도로 계속 뛴다는 것.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몰랐다. 무조건 빨리 뛰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속력으로 뛰다가 폐에 공기가 부족해지고 팔다리가 너덜거리기 시작할 때즈음에는 헥헥 거리며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달리기가 늘지 않았고 늘지 않으니 당연히 재미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달렸던 이유는 바깥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경치를 구경하는 시간들이 내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애인의 취미가 달리기였던 것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집이 멀어 같이 뛴 적은 없지만..!)




러너에게 공세권(공원 근처)에 집이 있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공원에서 달리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 밤 9시 이후나 새벽 5시 정도에 뛰어야 조금 살만했는데, 가을에 되니 저녁 7시 정도에 뛰어도 선선하고 좋았다. 무엇보다 같은 시간대에 꾸준히 뛰러 나오니까 공원에서 나처럼 뛰는 사람들과 내적 친밀감을 쌓여셔 연습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처음 내가 발견한 사람은 어떤 나이가 정말 많아 보이는 대머리 아저씨였다. 그분은 어찌나 열심히 뛰시던지 머리부터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 피부가 반질반질해지는 지경에 이르셨다. 뭘 위해 저렇게까지 뛰시는 건지 조금 궁금하면서도 '나도 저렇게까지 뛰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지레 겁부터 먹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을 페이스 메이커로 삼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딱 봐도 마라톤 고인 물을 페이스 메이커로 삼는다는 것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지만, 그 당시에는 마라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못 보던 언니가 아주 느린 속도로 공원을 뛰고 있었다. 나는 말꼬리처럼 찰랑거리는 포니테일 머리 언니 한참 뒤에 있었지만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매일 추월당하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와 나를 비교하며 내가 느린 것을 깨닫고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는데, 나보다 더 느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한껏 기세등등해졌다. 그러고선 묵묵히 달리는 언니를 속으로 한껏 비웃어주며 추월했다.

'얏호!! 나도 드디어 누군가를 추월해 보는구나~'

나는 자만 가득한 기쁨에 심취해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뛰다가 언니가 콩처럼 작아진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겨우 숨을 돌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뿌듯해하며 걷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언니는 나를 다시 추월했다. 신기했던 것은 언니의 속도는 아직도 내가 처음 추월했을 때의 속도, 그대로였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저 속도로 나를 쉽게 따라잡지? 분명 언니는 별로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숨을 헥헥 거리며 '쉬고 싶다'는 생각이 내 뇌 속을 장악하고 있는데 말이지. 이게 무슨 전래동화 '토끼와 거북이'같은 상황인가..! 그 동화를 수만 번도 더 읽고 접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그 동화의 교훈이 확실히 몸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결심했다.


아, 천천히 달려야겠다.

너무 빠르게 달리지도 말고, 그렇다고 걷거나 멈추지도 말고.

그저 같은 속도로 묵묵히 지치지 않게.






마라톤 참가를 내 버킷리스트에 적어 넣고 3년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라오스에서 10km 마라톤을 참가하게 되었다. 3년 전 그 언니를 만나고 결심했던 것처럼 대회에서 '걷지 않고 뛰기'를 실천하기 위해 결승선까지 부지런히 달렸다. 사실 그것을 유념하고 뛰는 것 외에 마라톤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무언가를 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나와 같이 마라톤에 참가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정한 목표(시간)에 맞게 연습할 수 있는 BPM음악을 골라 박자에 맞춰 발을 내딛는 것을 훈련한다고 했다. 반면에 아무 요령이 없었던 나는, 그저 대회 때 내가 정한 규칙을 지키기 위해 요령 피우지 않고 집중해서 뛰는 것이 다였다. 결승선에서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언니들이 나를 열렬히 반겨주고 있었다. 아마 아기 때 걸음마를 뗀 이후로 다른 사람이 나의 움직임을 칭찬해 주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렇게 결승선을 넘어서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나의 다리는 이미 뛰는 것에 적응이 되어버린 건지, 멈추려고 노력해도 계속 움직였다. 결승선에 들어오며 간판에 적힌 나의 기록을 보니 나름 여자 중에 상위권이었다. 순위는 내 목표가 아니었기에 별로 상관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서 한 나의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라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같이 뛴 언니들의 말을 듣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A 언니는 10km를 55분 만에 완주해 냈고, L언니는 무려 순위권 안에 들어서 트로피를 받았다고 하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A 언니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금세 시무룩해져 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각자 목표하던 것을 이뤘잖아!
L은 순위권에 드는 게 목표였고 나는 55분 안에 들어오는 게 목표였고,
유하 너는 걷지 않고 달리는 게 목표였는데 각자 그걸 해냈네.

그 말을 들으니 위로가 됐다. 하기야 나는 남들이 주는 트로피가 목적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멈추지 않는 것, 그걸 지킨 것, 그걸로 기뻐하는 내 자신이 트로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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