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는 어떻게 사회적 규범을 뛰어넘어, 꿈과 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
사회는 종종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틀로 우리를 구속한다. 그렇다면, 그런 딱지를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건 얼마나 힘들까?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는, 광부촌에서 자란 11살 소년이 발레라는 ‘비남성적’ 취미를 발견하며 벌어지는 파란만장 성장기를 그린다. 1984-85년 영국 광부파업이라는 역사의 배경에서, 전통적 ‘남성성’이 지배하는 탄광 마을에선, 한 소년이 발레를 꿈꾼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할 반역에 가깝다. 과연 가족과 사회의 장벽을 넘어, 빌리는 춤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이 작품이 출간된 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 세계 관객에게 강한 공감을 주는 까닭은 무엇이며, ‘성 역할 고정관념’과 ‘자기 효능감’이라는 심리학적 개념들은 이 영화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가족과 사회의 압력이 개인의 꿈을 어떻게 짓누르는지, 그럼에도 한 아이의 열정과 재능을 막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얼마나 많은 ‘당연한’ 것들이 실제론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벽인지, 그리고 그 벽을 깨트릴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한 뜨거운 문제제기다.
영화의 무대는 영국 북부의 탄광 마을로, 광부파업의 거친 풍경이 가득하다(달드리, 2000).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둘 다 광부로, ‘진짜 남자라면 복싱이나 하고, 노조파업을 지지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를 떨치기 어렵다. 이 삭막한 환경에서 빌리가 우연히 접한 발레라는 꿈과, 남성적인 ‘광부’ 문화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커서, 처음 보는 이들을 웃음과 동시에 한숨 짓게 만든다.
아버지는 빌리를 ‘사내아이답게’ 키우려 boxing 클래스로 보낸다. 하지만 빌리는 그저 지루함과 불편함만 느낄 뿐, 그 옆에서 연습하는 발레 수업에 훨씬 매력을 느낀다. 이를 보면, “남자면 복싱이지, 발레는 여자들 것이지!”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 분명히 코믹하게 드러난다(Bem, 1981). 사실 영화는 그 갈등을 웃음과 감동으로 풀어나가지만, 한 아이가 본능적으로 ‘발레가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견고한 문화적 편견을 건드리고 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영국 광부파업 시기는, 경제적 궁핍과 긴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Taylor & Lonsdale, 2010).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생계조차 위태로운 상황에서, “발레 클래스”에 돈과 시간을 쓸 가치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인식을 갖는다. 생존이 불확실한 조건 속에서는, 전통과 남성적 역할이 더욱 공고해지기 마련. 그래서 빌리가 발레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와 형이 분노와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현실의 파업 갈등이 빌리 집안을 더욱 팽팽하게 짓누르는 배경이 된다.
사회학적으로 ‘헤게모닉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이란, 한 지역사회에서 이상적인 남성상을 뜻한다(Eagly & Wood, 1999). 빌리의 마을에선 몸으로 때우는 광부 일, 복싱, 신체적 강인함이 그려내는 남성상 외에 ‘섬세한 춤’은 전혀 남성적이지 않은 행위다. 특히 아버지나 형은 춤을 “여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해, 빌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때 발생하는 갈등이 곧 영화의 주요 드라마를 구성한다.
빌리가 발레 슈즈를 들고 집에 오거나, 치마를 입은 소녀들 사이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한 마을의 전통적 가치관을 부수는 그야말로 혁명적 그림(Butler, 1990). 아버지가 화를 내며 수업에서 빼내려 하자, 빌리가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왜 발레가 남자아이에게 안 된다는 거지?”라는 질문을 일으킨다. 동시에 우리의 웃음과 공감도 이끌어내는데, 이는 이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때론 참혹하게 꿈을 꺾는지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빌리가 다니는 발레 수업을 이끄는 윌킨슨 선생님(줄리 월터스 분)은 “빌리 같은 남자아이가 발레하는 것”을 응원한다. 그녀의 존재가 이 시스템을 뒤흔드는 불온한 멘토 역할(Mead, 1935). 마을의 거친 남성 문화 속에서, 그녀는 빌리가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고, ‘발레학교 오디션’을 제안한다. 빌리에게 이건 놀라운 제안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이기도 하다—무엇보다 가족의 허락을 받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영화는, 한 사람이라도 지지해주는 어른이 있을 때, 어린이가 얼마나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지, 코미디와 감동 섞인 연출로 펼쳐낸다.
밴두라(Bandura, 1977)가 말하는 자기효능감은, “어떤 과업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뜻한다. 빌리의 경우, 여러 차례 발레 동작을 익히면서, 선생님에게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조금씩 “나 정말 발레할 수 있나봐?”라는 믿음이 커진다. 사회와 가족이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그에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줄 성공 경험이 축적되면서, 점점 성역할 고정관념을 부수고 의지를 키워간다.
영화 초반, 빌리는 자세도 제대로 못 잡던 아이였다. 하지만 반복 연습과 작은 칭찬, 그리고 “내가 느끼는 춤의 즐거움”이 결합해, 결정적 순간 ‘아카데미 오디션’을 보러 떠날 수 있는 담력을 안겨준다. 이 과정은 심리학적 ‘습득(숙달) 경험’이 자기효능감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그대로 재현(Dweck, 2006).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코믹하지만 진정성 있는 장면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빌리의 성장에 함께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아버지와 형은 처음엔 “발레? 당장 그만둬!”라고 윽박지르나,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라이크 상황이 악화되자, 빌리가 춤추는 모습을 본 뒤 충격에 빠지고, 끝내 감동한다. 아버지가 아들 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장면은, 빌리가 자기효능감을 시험대로 올려놓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미디적 긴장 속에서, 빌리는 웅크린 아이가 아니라 강렬한 의지를 지닌 ‘춤꾼’임을 증명하고, 가족도 결국 “그래, 이 녀석 정말 대단하잖아!”라며 항복한다.
빌리의 아버지, 재키 엘리엇(게리 루이스 분)은 전형적이고도 힘겨운 남성상을 짊어진 광부다. 낮은 임금과 파업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아들이 발레를 한다’는 건 낯설기만 하다. 처음에는 폭력적·공격적으로 “안돼, 그런 건 남자답지 않아”라고 반응한다. 빌리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부정하니 상처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감동 포인트는, 이 아버지가 ‘드디어 빌리의 춤을 직접 본 뒤’에 보이는 변화다. 아버지는 그 춤에서 아들의 진심과 재능을 발견하고, 파업 중임에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회적 갈등 속에서 가족 간 대립이 극단에 치닫지만,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라면”이란 부성애가 결국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영화 후반, 아버지가 아들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단순 희극이 아닌 진한 가족 드라마로 승화한다.
영화 속 형 역시 처음엔 빌리를 조롱한다. 하지만 점차 “이 아이가 정말 꿈을 가졌고, 그 꿈이 이 낡은 동네를 벗어날 유일한 희망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친구·이웃도 한 걸음 물러서서, 빌리를 따뜻하게 지켜본다. 결과적으로 가족 전체, 나아가 공동체가 빌리의 ‘발레 도전’이라는 작은 반역을 지지하게 되는 훈훈한 결말이다. 현실에서도, 한 사람의 꿈이 가족과 지역의 가치관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는, 빌리와 아버지가 함께 런던으로 가서 왕립 발레학교(로열 발레스쿨)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다. 거칠고 투박한 광부 마을 출신 꼬마가, 세련된 무대와 전문심사위원들 앞에 서는 풍경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감동(달드리, 2000). 코믹한 면도 있지만, 사실 빌리에게는 가슴 떨리는 결정적 시험이다. 만약 실패하면 “역시 우린 안 돼”라는 결말이 될 수도 있었으니.
물론 로열 발레스쿨 오디션에서도, 심사위원들은 어딘가 빌리를 특이하게 본다. 그러나 빌리는 자신의 열정과 실력으로 편견을 뚫고, 진정성을 전달한다(Butler, 1990). 엉성한 말투와 평범한 외모에도, 춤에서만큼은 발산되는 재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소년의 진심을 뚫고 심사위원 마음을 흔든다. 이 대목은 “춤이 여성적이라거나, 지방 출신이라 수준 낮다”는 인식이 얼마나 허무하게 깨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핵심 장면이다.
마지막, 오디션 결과가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빌리 엘리엇은 희망의 마침표를 찍는다. 어린 빌리가 정식 무대에 오르는 순간, 아버지와 형이 객석에서 감격하는 장면은, 이제 외적 장벽과 내적 불안 모두를 딛고 선 빌리의 완전한 정체성 변신을 보여준다(Dweck, 2006). 이 소년은 더이상 “광부 마을의 실수”가 아니라, “훌륭한 남자 무용수”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과 지역사회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빌리 엘리엇은 “남자가 춤을?”이라는 질문에 코미디와 감동을 섞어 답한다. 그저 몸으로 때우는 광부 역할만이 ‘남성성’의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한다(Eagly & Wood, 1999). 빌리의 집안이 겪는 갈등은, 남성성에 대한 낡은 믿음이 얼마나 개인의 잠재력을 가로막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영화가 이걸 단순히 “뚫는” 시원함으로만 끝내지 않고, 가족이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정성껏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성역할은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함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한다.
광부파업이라는 무거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한 소년의 예술적 재능이 삭막함을 뚫고 피어나는 전개가 상징적이다. 파업으로 경제적 위기에 놓인 가정은, 추가적인 비용(발레 레슨) 따위는 “사치”라고 본다(Taylor & Lonsdale, 2010).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끝내 파업의 자존심을 접고 일자리를 구해 돈을 마련한다. 이는 ‘가족 사랑이 사회 문제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이자, “한 아이의 꿈이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울림을 준다”는 영화적 강조다.
영화가 나온 뒤, 남성 무용수를 바라보는 인식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는 평가가 있다(Butler, 1990). 실제로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발레는 여자들만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냈다. 빌리가 춤추는 장면마다, 관객은 “멋있다, 아름답다, 잘한다”라는 감탄을 보내게 되고, 결국 남자 발레리노에 대한 시선이 조금 더 관대해지는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속 코미디적 장치들이, 결과적으로 “춤은 성별과 무관하다”는 흐름을 일상에 퍼뜨린 것이다.
가장 울림이 큰 장면 중 하나는, 아버지가 몰래 빌리의 춤 연습을 지켜보는 순간. 그 순간, 그는 말없이 뒤에서 빌리의 재능과 열망을 목격하고, 충격과 감동에 휩싸인다. 이전에 비웃고 압박하던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기점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졌는데, 내가 막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폭풍처럼 아버지를 흔들며, 격렬한 분노가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로 변한다(Polivy & Herman, 2002). 가족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뒤로, 가족은 재원을 마련하고, 빌리를 런던 오디션에 보낸다. 동네에서도 “아이가 대단하다는데”라는 소문이 돌고, 모두가 알게 모르게 응원하는 분위기가 생긴다. 이 변화는 작은 계기—아버지의 마음 돌림—이 지역 전체의 편견까지도 뒤흔든다는 것(Tice, 1992). 빌리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을, 이제 가족이 함께 나선다. 코미디가 잔재하는 이 장면들은, 사실상 “가족이 뭉쳐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감동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빌리가 발레리노가 되어 무대에서 뛰어오르는 장면은, 전형적인 해피엔딩이지만, 그 감동은 한층 크다. 그 아이가 꼭 성공해서 유명해진다는 게 요점이 아니라, 편견을 이겨내고 자신의 재능과 열망을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Dweck, 2006). 그리고 관객은 아버지와 형이 관람석에서 눈물짓는 장면과 함께, 한 소년의 성장사가 가족과 함께 완성되는 순간을 체감한다.
빌리 엘리엇(Billy Elliot)은, 한 소년이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구시대적 고정관념을 부숴가며 자신의 발레 꿈을 실현하는 성장담이다. 처음엔 광부 아버지와 형의 반대,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 자신조차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한 아이의 끈질긴 열정과 작은 성공 경험들이 모여, 스스로를 믿게 하는 자기효능감을 꽃피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가족도 편견에서 깨어나 함께 손을 잡고 큰 무대로 나아간다.
심리학적으로, 이 영화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리의 꿈을 제한하는지, 그리고 그 틀을 깨기 위해선 자존감과 대인관계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빌리가 실제로 겪는 갈등과 희극적 요소는, “세상이 정한 틀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유쾌하게 던진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비록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 길이라 해도, 내면의 불꽃이 진심이라면 주변도 변하고, 기존 질서를 넘어 참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하여, ‘남자애가 발레를?’이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마침내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있다면, 가족과 사회의 반대가 아무리 거세도, 너는 춤출 수 있다.” 빌리 엘리엇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위에서 도약하는 빌리의 모습은 단순한 발레의 비상(飛上)이 아니라, 온갖 편견과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 ‘꿈대로 살겠다’는 인류 공통의 희망을 상징한다. 그 희망과 감동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오래 가슴에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