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다에서 태어나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뭍에 내린다. 한 걸음 한 걸음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남는다. 뭍에 먼저 도착한 이들은 이 방향으로 걸어야 좋다며 그에게 한 마디씩 건넨다. 남동쪽으로 45도 방향으로 걸으면 과수원이 나온다는 사람, 동전을 던져가며 동서남북을 번갈아 걸으면 길이 멋있게 난다는 사람, 앞만 보고 걸으라고 충고하는 사람. 한 번씩 건네는 조언에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아직도 바다 근처다. 저 멀리 과수원에 왔다며 소리 지르는 사람, 올곧게 걷는 사람, 자신의 발자국마다 꽃으로 장식한 사람을 보니, 그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주저앉고 싶어진다. 누군가 등을 토닥거려 올려보니, 한 사람이 인자한 미소로 웃고 있다. “너한테 어울리는 길은 네가 제일 잘 알아” 그리고 떠나간다. 주저앉아있던 그, 과연 자신의 길을 찾았을까?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업무 때문에 자유롭게 개인 시간을 운용할 수 없다고, 회사의 이념과 나의 가치관이 상충된다고 아쉬워해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닌다고 불평할지라도, 그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 선택의 결과다. 그 직장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을지, 어느 정도로 헌신할지, 그리고 직장 밖에서 개인 시간을 어떤 활동들로 꾸릴지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세파에 시달려 선택과 결정의 무게가 버거워지면, ‘그냥 사는 대로 살아야지’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책임을 미루다 보면 엉뚱한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싶은지, 제대로 걷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어느 곳에 서 있든 인생에 별 차이가 있겠냐며, 이 삶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고민하지 않고 살게 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인지, 상대방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게 옳은 일인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워진다. 나의 행동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 길을 걸어온 나’를 ‘발걸음의 궤적을 바라보는 나’가 이해하지 못하면, 휘청대다 그만 걷기로, 혹은 뭍에서 탈출해 바다에 빠지기를 택할지도 모른다.
이왕 걸어야만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걸으면 어떨까? 물론 걷다 보면 들짐승과 맞닥뜨리기도 할 테고, 가끔은 발바닥이 아파 그만 걷고 싶기도 하고, 찬 바람에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을 인생이라며 지레짐작해 포기하지 않고, 내가 직접 그 길을 꾸려보면 어떨까? 자신의 의지로 걸음을 딛는다면, 적어도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 길을 냈는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다. 지금은 내가 가고자 하는 곳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길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사색과 결심이 지속되는 것이다.
나는 하루 중 25분을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하는 시간으로 살고자 한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몰입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경험이, 차분하게 행동하지 못해 후회했던 기억이 잦은 내게, 지금 걷는 이 길에 관해 곱씹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주변 사람에게 따뜻한 에너지를 전하는 사람, 시련에도 침착한 강인한 사람, 나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시도하며 끝없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과연 오늘의 발자국이 나의 소망과 맞닿아 있는지, 스스로와 꾸준히 대화를 나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