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존재가 불안으로 다가오지 않길 바라요
코로나를 생각하니 떠오른 것들
‘3번 확진자의 동선 내역을 말씀드립니다. 2월 28일 오후 5시 편의점, 3월 1일 오전 11시 스크린골프장...’
코로나 감염이 흔치 않던 2020년의 봄, 감염자의 동선 내역이 인터넷을 타고 온 나라에 퍼졌다. 어떤 사람은 동선에 모텔이 찍혀 불륜 사실을 들켰다느니, 편의점과 회사만 다녀간 사람에겐 참 재미없게도 산다느니 아무렇게나 쓴 댓글이 넘쳐났다. 코로나에 걸려서 후각이나 미각이 손상될 수 있다는 걱정보다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쳐 비난받을 것이란 두려움, 나의 동선이 입방아에 오르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다. ‘언제 걸리든 우리 회사 1호 감염자만 아니게 해 주세요.’ 사내 코로나 확진 문자를 받을 때마다 저 소원이 슬며시 새어 나왔다.
회식이 하나 둘 취소되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재택근무를 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웬만큼 지치지 않은 이상 시간이 나면 밖으로 향했던 내게 집 안에서의 일상은 처음엔 답답하기만 했다. '아 심심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법을 몰라 어영부영 보내는 것 같아 죄책감을 가지며 프리랜서의 위대함을 깨닫기도 했다. 그래도 회식이 이렇게도 취소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지 않고 여유롭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신선하기도 했다. 화상회의를 하며 우리가 매일 보지 않아도 회사가 조금은 굴러갈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코로나는 사람들의 손길이 가장 간절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멍에를 선물했다. 어느덧 예비부부는 불편한 시국에 개념 없이 사람들을 초대하는 몰상식한 자가 되어버렸다. ‘우리 회사 방침이 엄격해서 못 갈 것 같아.’라는 친구의 말에 서운함이 밀려와도 "괜찮아!"라며 내색할 수 없고, 청첩장을 전하며 “죄송합니다.”란 말이 입에 자연스레 붙어버린 게 씁쓸했다.
코로나는 세상을 등진 소식을 알리는 것조차 힘겹게 만들었다. 떠난 이의 넋을 잠시나마 함께 위로해달라고 간청하는 게 부담이 될까 싶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조문은 사양합니다’라는 문구를 꾹꾹 눌러 보내야 했다. 상주가 되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허덕이다가 조문객을 맞이한 순간에야 비로소 정신이 든다. 아직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지 않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기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쓸려 더 따갑기만 할 때라, 조문을 애써 만류해야만 하는 현실은 유난히 아팠다.
그래도 코로나를 뚫고 축하하러 먼 길을 온 친구들, 얼굴이 반쪽이 됐다며 함께 슬퍼해 주던 회사 동기들 덕분에 사람의 소중함을 실감했다.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해야 했던 시기에 소중한 사람을 향한 마음은 더 깊어졌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전에는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조문은 하지 않았던 내가, 장례식은 가능한 꼭 가기로 마음먹게 된 것도 어쩌면 코로나 덕분이다.
이렇게 코로나와 함께 경사와 조사를 치르며 쓴맛을 봤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월세와 관리비를 걱정해야 하는 일상을 몇 년간 견뎌온 자영업자의 고통에 견줄 수 있을까? 외롭고 답답하고 우울했을지언정 몇 달간 계속하여 생계의 위협으로 잠들지 못하던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카페 내 취식도 어렵던 겨울엔 출퇴근길에 텅 빈 가게 안을 열심히 쳐다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구누구는 주식으로 몇 천을 벌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코로나야말로 아픈 사람들을 더 아프게 하고, 자주 웃는 사람들에겐 더 큰 웃음을 선사하는 차별주의자였다.
여전히 코로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조심스럽지만, 어느덧 마스크를 쓰고 문 밖을 나서는 게 일상이 되고 코로나와의 공존이 익숙해진 걸 보면 불과 2~3년 전의 기억이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인 것만 같다. 코로나 덕분에 개인의 삶을 좀 더 존중할 수 있었고, 대면으로 일하는 게 유일한 업무 방식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서로의 존재가 두려움이 되는 경험은 가능한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