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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Aug 03. 2022

사람에게도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주 일상 에세이 





요리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마늘을 넣게 된다. 대부분 집에서 얼큰하고, 칼칼한 음식들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마늘을 양껏 넣어도 마늘향이 묻힌다. 가끔 양 조절을 잘못해서 이게 황탯국인지 마늘 국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지만 마늘 왕국 사람답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변에 있는 백인 친구들은 국 위에 떠있는 마늘을 보고 기겁한다. 


가끔 이렇게 무의식 속에 빠져 인지하지 못하다가 문뜩 뒤통수를 한대 쌔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최근 한국에 다녀온 지인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평소 걷던 거리인데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건물이 있었다.  건물 맞은편 인도에서 바라보는데 한동안 멍하니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멜버른에서 빅토리아 풍, 바로크 양식 건물들은 한 번씩은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4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출퇴근하는 루트 중 한 곳 이어서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지나쳤을 텐데 이제 발견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건물 내부가 얼마나 아름다우면 건물 내부를 가상 투어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눈으로 건물 내부를 확인해보고 싶다. 


333 Collins 건물 내부 Virtual Tour 웹사이트



 





지인과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분위기에 한껏 취해 식당 근처에 있는 바에 갔다. 구글 지도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정말 이런 곳에 바가 있을까 싶었는데 거리를 보는 순간 잠시 분위기에 매료되어 지인들과 시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멜버른 시티에 4~5년 정도 거주하고 있는 분들이었지만 이런 곳에 바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분명 시티 안에 있는 바인데 이곳은 다른 곳들과 달랐다. 조용하다는 표현보다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거리의 적막함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바에 들어가는 순간 내가 지금 바에 들어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말 작은 바였다. 


바 안의 분위기가 침울하기까지 보이는 공간이지만 직원인지 손님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소를 뗘주었다. 비 내리고 난 직후 우중충한 날, 영국 골목길에 자리 잡은 펍 같은 느낌이었다. 항해를 떠나기 전 기쁨과 아쉬움을 맥주 한잔에 모두 집어넣어 마실 것 같은 공간이었다. 


내부가 생각보다 작았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자리를 이동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무거운 공기까지 공유해보고 싶었다. 






첫 번째 바에서 걸어서 1분 정도에 있는 곳에 두 번째 바가 있었다. 호주에 처음 와서 첫 직장 사람들과 생일 파티를 했던 곳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았지만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자연스레 잊혔는데 그 당시에는 구글 스트릿 뷰를 보며 어디인지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 그런지 너무 반가웠다.  


이곳도 크기가 큰 편은 아니지만 노래 때문에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걱정도 없고 진토닉이 다른 바에 비해 저렴한 탓에 마시는데 부담이 덜했다.  4년 만에 찾은 공간은 바로 어제 왔다 갔던 것처럼 반가웠다.  추억 속에 빠져 4년 전 이곳에서 생일 파티를 같이 했던 지인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이곳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술에 취해 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같이 추억팔이를 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울고 웃었던 일들이 많다 보니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억이 많이 남았다. 


네그로니 한잔 마시며 지인들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호주에 머물며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되었다. 








트램을 타고 집으려 가려던 중 저녁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아님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속이 불편했다. 같이 가던 친구도 나와 비슷한지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시끌벅적한 시티 중심부를 벗어나 야라강을 따라 걸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 선선히 부는 날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호주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지금은 어떤 것이 목표인지, 미래의 목표는 무엇인지 차곡차곡 쌓아온 호주 이야기를 꺼냈다. 

새롭게 만나는 인연보다 헤어지는 인연이 많은 지금 이런 묵혀둔 이야기를 하는 게 어색하고 반갑다. 

그땐 아무 걱정 없이 하루하루 즐기기 바빴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건지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그 인연의 특권이다. 할머니가 상 당하신 날.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할머니 방 거실에 놓여있던 가족사진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가던 날 그렇게 나와 할머니만의 추억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더 이상 맞장구 쳐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꽤 외로웠다. 

그 뒤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에 비하면 호주에서의 인연은 쉽게 이별한다. 저마다 목표를 향해 떠나가는 것이지만 이제 머물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는 그 빈자리를 메꾸는데 또 다른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일까 아주 조금은 사람들이 무슨 비자인지 물어보는 게 이해된다. 


멜버른에 4년 동안 있으면서 눈치 채지 못한 건물들,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거리들,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잊힌 거리들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거리들. 


옆에 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인연들, 새로운 인연들, 잊혀 가는 인연들 그리고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인연들. 


사람에게도 시각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발견하지 못한 인연들은 한 번씩 나를 쳐다보고 가세요! '

' 내가 여기 있으니  새로운 인연들은 자주 연락해요! '

' 내가 여기 있으니 우리 서로 잊지 말아요! '

' 내가 여기 있으니 앞으로도 쭉 같이 걸어요! '


내가 아무리 억지로 인연을 이으려 해도 떨어져 나갈 사람들은 알아서 떨어지고 잊힐 사람들은 잊힌다지만 그래도 이정표를 보면 아주 잠깐 동안의 추억쯤은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333 Collins St, Melbourne VIC 3000



Presgrave Pl, Melbourne VIC 3000



322 Little Collins St, Melbourne VIC 3000 / Chuckle Park Bar





Jim Stynes B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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