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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인가요? 라고 물으신다면

온 세상의 돈이 모이는 곳

by PUMPKINMAN


뉴욕 타임스퀘어 - 직접 촬영

사실 미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꿈의 영역이었다. 상상은 했지만, 회사 주재원 말고는 사실상 방법이 없었다. 출장 이후 몇몇 선배가 회사의 학위 파견 제도를 통해 미국으로 MBA를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공짜로 석사 학위를 갖게 된다니.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학교에서 모든 생활비를 대준다니. 이 엄청난 제도를 나도 누려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나와 같은 부품 같은 존재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다.

대리를 달고 나서 나는 이 팀(신입으로 입사했던)에서는 MBA를 보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내 이동 제도를 통해 다른 팀으로 옮겼다.


큰 마음을 먹고 사내 제도를 통해 이동을 했던 팀이 폭파 되었다. 안 그래도 팀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반이 탈출을 했는데, 그 팀이 없어진 것이다. 해당 부서에 지인도, 아는 사람도 없던 나는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에버랜드에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나는 갈 곳을 찾아 나의 인맥을 총 동원하기로 했다. (인맥: 1명)


"선배님, 저 그 팀으로 갈 수 있을까요?"


과거 잠깐 같이 근무를 했던 선배가 같은 건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오랜만에 연락을 드려 상황 설명을 했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린 선배는 흔쾌히 팀장에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사실 그 팀이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글로벌 사업을 하는 부서였는데 스텝 부서에서만 있었던 내가 사업 부서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라도 소속 되지 않으면, 나의 의지와는 다른 팀으로 가게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양 조직 책임자 간에 논의가 잘 되었고, 나는 부서를 또 이동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나중에 더 이야기를 하겠지만, 나는 늘 이 부서에서 근무했던 나의 1년을 잃어버린 1년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1년이었다.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내가 옮긴 부서는 미국, 유럽 등 해외에 있는 파트너들과, 법인 사무실 인원과 협업을 하는 곳이었다. 매일 같이 해외 파트너사와 영어로 회의가 진행이 되었다. 어릴 적 운이 좋게도 해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나의 영어 실력을 뽐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도 잠시, 첫 회의에 들어간 나는 좌절을 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자기 소개까지는 능숙하게 했지만(=대본을 읽었지만), 그 뒤로는 회의에 참여를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첫 임무는 회의록 작성이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작성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매 회의를 녹음을 했고, 그 녹음본을 들어가면서 회의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팀을 이동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해외 업체들과 영어를 활용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영어는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절이 부끄러웠다. 내가 배운 영어는 비즈니스에서는 활용이 어려웠고, 끌어올리기 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해외 체류 기간이 많지 않은 선배들이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멋지다고 생각을 했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부딫히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1년 넘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나는 일부 파트너사 회의 리딩을 혼자 맡으면서 동경했던 선배들 처럼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중 되서야 느낀게 하나 있다. 해외 파트너사, 법인 인원과 같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일하는 방식, 열정, 전문성(아무래도 우리 사업은 주로 미국 시장에서 수익이 발생하다 보니)에 매료 되기 시작했다. 조직 책임자를 중심으로 모든 의사 결정이 진행되는 한국 회사와는 달리 모두가 본인 업무에 대한 책임을 갖고 의사 결정을 하고 있었다. 그 들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 파트너사와 대면 미팅을 진행 하면서 알게되는 업계 사정들을 바탕으로 전문 지식을 쌓아가고 있었다. 정작 사업을 리드해야 하는 본사 입장에선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제한적이라, 의존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나는 사실 이 현실이 답답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왜 미국에 가고 싶은 거야?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해외 법인 파견 제도라던지, 해외 학위 파견 같은 제도를 통해 미국(또는 다른 국가로)에서 거주해볼 수 있느 기회가 있다. 그러나 이는 선택 받은 자들(?)만 갈 수 있으며, 나 같은 <부품 20392호>는 후보에도 오르기가 힘들다. 게다가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자리다 보니, 후보에 오르더라도 내 순서를 한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몇년 전 동부 출장 중 동네를 걸어가다가 살아보고 싶은 집이 보여 찍어보았다.

나는 새로 옮긴 팀에서 근무를 하면 할수록 주재원 파견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배우고 싶었고, 그들처럼 일하고 싶었다. 꿈을 꾸는건 잘못된게 아니기에, 조금씩 머리속에서 미국에서 출퇴근 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미국, 그리고 가족

미국에 가고 싶은 이유는 업무적인 것도 있지만,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가족이다. 아내와 함께 서울 시내를 운전하다 보면 꼭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여기 자기 일했던 곳 근처 아니야?"였다. 아내는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강서, 강북, 강동, 강남 여기저기서 일을 했었다. 프리랜서로도 일을 했었기 때문에 그야 말로 서울 어디를 가던 아내가 한번쯤 일을 했던 장소였다. 이제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쉼표 한번 없었던 아내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면 어쨋든 회사에서 의식주는 해결해주니까. 아내도 잠시나마 인생에서 쉼표를 갖고 운동도 하면서 남은 인생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아이들 교육도 있다. 나도 운이 좋게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터라, 어떤 장점이 있는지 알고 있다. 너무나 자유로웠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다. 공부를 해서 1등을 찍어야지가 아니라, 공부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들 - 컴퓨터, 기타 배우기, 아이스 스케이팅 등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가 있는 환경이었다(물론 부모님께서 열심히 지원을 해주신 덕분이겠지만). 나는 때로는 마당에서 스케이트보드를 연습을 하기도 했고, 집 뒤에 있는 공원에서 뛰어 놀거나 잔디밭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지만)말고도 할 수 있는게 많았고, 내가 성인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마인드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리 가족, 특이 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집 근처에 있던 공원 - 출처: Noriko Matsuhasi (Google Maps)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날미국 법인 직원들이 한국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 나에게는 하나의 작은 터닝 포인트가 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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