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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May 13. 2020

생활 속 질문매뉴얼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속사람을 잘 보여줍니다. 사용하는 어휘나 표현뿐 아니라 억양까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안에 있는 것이 말로 흘러나오는 셈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언어가 사람을 빚기도 합니다. 형상을 빚는 조각도(彫刻刀) 같은 언어!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던 도시 키프로스에 사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의 이름에서 따온 표현이죠. 결혼조차 안 하겠다고 선언했던 그가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집니다. 헌신적인 그의 사랑에 감동한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을 실제 여인으로 변신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로 설명합니다.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여자로 대했을 때 실제 살아 숨 쉬는 여자, 갈라테이아가 됐던 것처럼, 대상을 향한 기대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죠.      


조지 버나드 쇼. 당대의 무용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사도라 덩컨이 그의 두뇌와 자신의 미모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좋은 일 아니겠냐는 유혹(?) 뚝뚝 떨어지는 제안을 하자, 자신의 얼굴과 덩컨의 머리를 닮을까 걱정된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촌철살인의 영국 극작가입니다. 그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영화화한 <퍼니페이스>. 거친 말을 쏟아내며 거리에서 꽃을 팔던 머리 산발한 여성이 보여주는 놀라운 변신 이야기, 기억하시죠? 언어학자 히긴스 교수의 6개월에 걸친 혹독한 언어 교정 수업의 결과 성공적으로 상류사회에 데뷔하는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우아함의 정석이죠.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조각가였습니다. 날카로운 조각도로 직접 여인을 조각했지요. 희곡에서는 언어가 조각도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조각도가 되어 우리의 존재를 빚어내는 것이지요. 런던 칵크니 억양을 쏟아내는 거리의 잡상인이 될 수도 있고, 품위를 갖춘 상류층 여인으로 뭍 남성들의 시선을 싹쓸이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는 이렇게 강력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언어의 힘을 믿습니다. 언어의 변화를 통해 삶을 바꾸고 싶습니다. 주어진 길이 전부인 줄 알고 앞만 보고 달렸던 삶의 방식이 아닌, 어떤 길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탐색하기. 좀 더 안정적인 길로 판명될 때까지, 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길 중 내가 갈 수 있는 길, 가고 싶은 길이 어떤 길인지 탐구하기. 길이 막혔을 땐, 그냥 주저앉아 막연히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길이 왜 막혔는지, 어떻게 하면 막힌 길 너머로 갈 수 있을지 방법 찾기. 잘 모르는 현상이나 사실을 마주하면 내 안의 물음표를 찾아 적극적으로 답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마흔을 넘고 보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매 순간 묻고 답하는 자세. 피그말리온의 조각도 보다 더 예리하게 파내고 긁어내 제 안에서 끌어내고 싶은 모습입니다. 좀 깊이 있어서 그렇지 제 뱃속 저 아래 분명히 존재하는 복근처럼, 이 변화의 씨앗도 제 안에 있다는 걸 압니다. 제 변화만큼 아이들도 변화하면 좋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묻고 답을 찾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 제 언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언어를 바꾼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언어는 곧 우리 자신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언어 습관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매뉴얼을 떠올렸습니다. 매뉴얼은 상황에 따라 정해진 행동방식입니다. 따라 하기는 변화를 끌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요. 몸에 배지 않은 행동을 습관으로 바꿀 때 매뉴얼은 매 순간 고민하지 않고 바로바로 적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매뉴얼은 이렇습니다.      


<질문의 여왕으로 거듭나는 질문매뉴얼>                    

 ~해야 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원래 그런 거야.                                   그러게. 왜 그럴까?

엄마도 모르겠다.                                 어떤 책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까?

이리 와봐. 엄마가 해줄게.                   어떻게 하는 걸까? 방법을 찾아보자.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고~

동생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동생하고 싸우지 말아야 할까?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해.                         둘 다 기쁘려면 어떻게 정하는 게 좋을까?

엄마 화났어.                                         너희들이 그렇게 싸우면 엄마 기분이 어떨까?

차근차근 해야 하는 거지.                      어떤 일을 먼저 하면 좋을까?

어쩔 수 없어.                                        정말? 이렇게 해보면 어때?


표의 오른쪽 표현은 자주 사용하는 말을 질문으로 바꿔 본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외웠습니다. 질문이 먼저 나오지 않고 왼쪽에 있는 평서문이 먼저 튀어나왔거든요. 익숙한 말들이니까요. 그래서 매뉴얼처럼, “이” 말이 나오려고 할 땐 “요” 질문으로 대체했답니다. 금방 바뀌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평서문의 마침표를 의문문의 물음표로 바꾸다 보니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끝을 올리는 질문문 억양에 저도 익숙해지더군요.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의 눈빛이었습니다. 질문으로 바꾼 것뿐인데 아이들의 동공에 지진이 났습니다. “생각”을 하더군요. 생각구슬이 또르르 또르르 구르느라 분주한 머릿속이 보일 것 같은 눈빛으로 제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실, “엄마 화났어.”라고 말해봤자. 아이들 잠깐 멈칫하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시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요. 그런데 “엄마 기분이 어떨까?” 하고 물어보니 아이들이 사뭇 진지해집니다. “안 좋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엄마를 불쌍히 여기는 표정도 지어 보입니다. 물어보니 아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질문하니 아이들은 답을 찾았습니다.      


영화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은 사용하는 언어를 바꿔 사교계의 꽃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합니다. 아이가 셋이 아니고 둘이라, 지금이라도 하늘나라 선녀어(仙女語)를 하드 트레이닝 하면 저도 날개옷 입고 변신해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머리가 봉두난발 지경이 될 때면 나도 전직 선녀였다고, 훨훨 날아오르겠다고 홀로 외치는 때도 있답니다. 하지만 저는 하늘나라 선녀어 대신 질문언어를 선택했습니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가능한 많은 질문을 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대답을 모르면 몰라서 질문하고, 대답할 말이 있으면 아이가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질문을 하려고 오늘도 맹훈련 중이랍니다.   

  

존경하는 축구 감독님 중에 ‘닥공’의 신화를 쓰신 분이 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감독님의 통역을 맡으면서 가까이서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선수들에게는 따듯한 아버지같이, 주변 관계자들에게는 동네 어르신처럼 마음을 써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그분의 명언이 바로 닥치고 공격, 닥공 입니다. 좀 과격하게 들리지만 축구의 승리는 골이 결정하고, 골을 내려면 일단 공격해야 하니까요. 육아라는 광활한 필드에서 저도 감독님을 따라 해봅니다. 전 ‘닥따’ 질문법, 닥치고 따라 하는 질문방법을 택했습니다. 일단 매뉴얼의 질문들을 따라 해봅니다. 지금은 어색한 외국어 같은 질문들이지만, 외워서 따라 하다 보면 내 입에 착 붙을 날이 올 테니까요. 부지런히 질문들을 쏟아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축구 공격수들이 하는 말처럼 어느 순간 골이 발에 ‘착’하고 감기듯 멋진 질문이 제 입술에 감기는 그런 순간이 올 겁니다. 골망을 멋지게 흔들며 골대로 빨려 들어가는 골처럼, 문제를 해결할 창의력 뚝뚝 떨어지는 멋진 질문으로 아이와 대화할 그 날이 오리라 믿기에 오늘도 닥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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