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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May 13. 2020

질문을 배우는 왕도, 여행

 지금도 어렵지만, 처음에 아이들에게 질문할 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사실 육아의 일상은 눈 감고 입 닫고 귀 덮은 채로 지내도 충분히 분주합니다. 별생각 없이 하루를 살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빨래는 세탁기가, 말리기는 건조기가, 밥은 밥통이, 청소는 청소기가 해줘도 주부의 집안일은 끝이 나지 않는 미스터리랍니다. 참 신기하지요. 특별히 의식하고 뭔가를 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하루.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 질문이라는 특별한 ‘일’을 추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질문하기 연습을 의식적으로 시작할 즈음 아이들과 주말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경주였는데 보통 때와 달리 아이들에게 질문하기가 훨씬 수월했습니다. 부담이 아니라 즐거웠고 심지어 살짝 흥분되기까지 했거든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경주라는 여행지는 제게도 낯설었고,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였습니다. 불국사 문고리에는 왜 도깨비 문양이 새겨져 있는지, 한 자리에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양은 왜 그렇게 극명하게 서로 다른지. 일단 제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이 던져지더군요. 석굴암 천정처럼 둥근 돔 모양으로 만들려면 돌을 어떻게 쌓아야 할까? 첨성대에서는 정말 별이 잘 보였을까? 별로 높지 않은데, 평지에서 관찰하는 것과 뭐가 달랐을까?     


여행은 제 안에 잠자는 질문 본능을 깨우는 각성제였습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니 아이들에게 던질 질문거리를 굳이 생각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많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더군요. 일상에서 우리는 ‘당연한’ 일과 ‘원래 그런’ 것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실 조금만 따져보면 각각의 이유와 원리가 있을 텐데 우리가 궁금해한 적이 없어서 답을 모르죠. 그런데 온통 낯선 여행지에 가니 달라지더군요.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질문만으로도 아이들과 생기 넘치는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아이들의 고유한 생각을 들으니 이미 즐거운 여행이 더 흥겨워진 건 물론입니다.      


바다 여행도 그랬습니다. 아이들과 처음 만난 바다는 인천 앞바다였습니다. 영종도에 위치한 을왕리해수욕장 부근이었지요. 1살 큰애는 품에 안고 있었고, 나중에 알았지만 둘째도 그때 제 배 속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반듯반듯한 바다밭 양식장에서 굴이 크는 남해안 통영의 옥빛 바다를 다녀왔고, 검은 모래와 자갈이 발바닥을 찌르는 여수 검은모래해변에서 아이들은 아빠 품에 안겨 7번 부표까지 왕복하며 물놀이를 했습니다. 멀리 송이버섯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동해안 낙산해변의 하얗게 날리는 모래사장에서 간식으로 준비해 간 모닝빵에 우유로 점심 끼니를 때우며 온종일 모래놀이도 했습니다. 부산 해운대에서는 행사장에서 울리는 음악소리와 어슴프레한 저녁하늘을 배경으로 아예 모래사장에 누워 허우적거렸더랬죠. 광안리 해변을 뛰어다니며 미역, 다시마, 조개껍질 등 주변의 온갖 재료를 주워와 만든 모래성으로 말할라치면, 스페인의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이 부럽지 않았답니다.      


바다에는 온갖 생명이 넘치지만, 그중에 제일은 물입니다. 움직이는 물의 에너지는 해안선의 모습을 바꿀 정도니까 말입니다. 원래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지만, 바닷가에서 놀 때 더욱 즐거워하는 건 아마 물의 생명력 때문일 겁니다. 그 물이 만들어 놓은 풍경. 똑같은 바다지만, 동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남해안의 바닷가는 달랐습니다.      

“어, 여기는 인천 앞바다하고는 다르네. 거기는 거칠긴 해도 갯벌이 있었는데. 회색 진흙 같은 벌을 밟았었는데 그치?”     

“와, 모래사장이다. 하얀 백사장이다. 모래 알갱이가 소금 같다. 이렇게 작은 알갱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여기는 왜 이렇게 모래가 많을까?”     

“모래가 까매. 자갈도 까매. 신기하다. 그런데 여기는 모래가 많지 않네. 자갈도 많이 섞여 있네. 바다마다 모습이 다 다르다. 이유가 뭘까?”     

아이들이 부지런히 모래성을 만들 때, 물가에 앉아 손바닥으로 물을 쓰다듬으며 엄마에게 미소 날릴 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듣고만 있을 때도 있었고, 엄마를 놀라게 하는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건, 여행이 아니었다면 나눌 수 없는 대화였다는 점입니다.      


낯선 환경에 선다는 건,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의 호기심도 자극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질문하기 어색한 부모님도 여행지에서는 자연스럽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토대로 질문하는 일이 익숙해지면 여행을 떠나기 전 조금 준비해서 가는 것도 추천합니다. 다른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준비하면 내용이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니까요.      


불국사는 신라시대 재상인 김대성이 지은 두 개의 절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석굴사라고도 불리는 석굴암이지요.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엉터리 복원으로 원형이 많이 손상된 우리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그럼에도 아름답게 빛나는 문화유산입니다.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김대성이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아이들과 경주 여행하면서 그냥 흘러가듯 물어보았습니다. “김대성이라는 사람이 불국사도 석굴암도 지었대. 우와, 토함산 기슭에 절을 두 곳이나 지었네. 왜 그랬을까? 절은 어떤 마음으로 짓는 걸까? 이렇게 크고 멋진 절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절을 지으면 뭐가 좋길래 이렇게 투자한 걸까?”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하는 여행이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유산을 통해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이해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굽이굽이 석굴암 주변을 탐방하느라 바빠 엄마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아이들이 질문하기를 배웠다고 말입니다.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니까요. 그리고 질문을 들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각도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여행은 질문하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선 여행을 떠나보세요. 낯선 환경에 가면 엄마, 아빠에게도 당연한 것은 없어지거든요. 하다못해 무엇을 어디서 먹을지부터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를 서로 물어봐야 합니다.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자면, 여행지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에서 꼭 “왜”라는 이유를 물어보세요. 왜 이 메뉴를 먹어야 하는지, 왜 다른 곳이 아닌 그곳을 방문해야 하는지, 왜 이곳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지 등등 말입니다. 뭐든지 그렇지만 처음이 어렵지 일단 터진 “왜”는 사실 통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아진답니다. 질문 거리가 그만큼 넘치는 셈이지요. 그래서 여행은 우리 안에 질문 본능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루아침에 우리 입에서 질문이 쏟아져 나오게 해주는 마법 지팡이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 질문 DNA를 깨워줍니다. 잠깐 배를 만져보시겠어요? 말랑말랑하죠. 식스팩까지는 아니어도 좀 단단한 복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몰랑몰랑한 피하지방과 내장지방 사이 저 안쪽에 근육이 있긴 하답니다. 좀 깊이 있어서 문제기는 하지만요. 잘 안 보여도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질문 본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원래 호기심이 강한 존재거든요. 깊이 있어서 안 보이는 우리 복근처럼 호기심도 분명 우리 안에 몸 사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본능을 자극해서 존재감을 주는 겁니다. 한 번 떠나보세요. 준비물 하나, “왜”로 시작하는 질문 패치 장착하고 아이들과 주변을 둘러보세요. 신기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듣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질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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