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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May 14. 2020

장수풍뎅이가 행복할까?

:아이들도 논리적으로 생각합니다.

둘째는 곤충을 어지간히 좋아합니다. 시골 외할머니 집에 가서 삼촌이 잡아준 장수풍뎅이며, 엄마랑 매미채로 잡은 올챙이 등을 관찰하고 나서 놓아주는 일은 그래서 어지간히 어려웠습니다. 매번 실랑이가 벌어졌죠. 키울 수 있다며, 문방구에 풍뎅이가 먹을 곤충젤리도 팔고 올챙이 먹이도 자신이 챙겨줄 수 있으니 키우자며 고집을 피우곤 했습니다.      


5살에 맞은 여름, 둘째의 곤충 앓이가 장수풍뎅이에 꽂혔습니다. 

“엄마, 장수풍뎅이 키우면 안 돼?”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는 엄마를 끈질기게 설득했죠. 

“명아, 장수풍뎅이가 뭐 먹고 살지?”

“참나무즙”

“키우려면 먹이를 줘야 하는데, 참나무즙을 어떻게 구해주지? 어렵겠네. 못 키우겠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엄마에게 이 문제는 사실 답이 정해져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집에서 키우는 장수풍뎅이를 보고 온 둘째에게는 장수풍뎅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서 저보다 더 많은 정보가 있었습니다.

“엄마, 곤충 젤리 주면 돼. 문방구에서 팔아. 선생님이 말해줬어.”      


전 솔직해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편견을 심어주지 않으려 곤충을 대할 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엄마였지만, 사실 전 곤충을 징그러워했습니다. 특히 꼬물대는 애벌레라면,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싫었습니다. 그런 제게 집에 곤충의 알을 들여놓은 일은 글자 그대로 불가(不可)한 일이었죠.      

안 된다고, 선을 확실히 그었습니다. 엄마가 곤충을 못 키운다고요. 하지만 왠지 마음 한쪽이 불편해 또 다른 이유도 덧붙였죠. 곤충 복지의 이유라고나 할까요. 

“먹이는 곤충 젤리 먹는다지만, 명아, 산이 아니라 좁은 상자에 살아야 하는 장수풍뎅이가 과연 행복할까? 넓은 산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집요한 구석이 있는 둘째는 이후로도 호시탐탐 장수풍뎅이를 키우면 안 되냐고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장수풍뎅이 키우기 실랑이가 반복됐던 여름의 끝자락에 둘째에게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골 외할머니집에서 저녁에 밖에 나갔다가 수컷 장수풍뎅이 한 마리를 잡은 겁니다. 가만 보니 기운이 없이 잘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이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어느 정도 관찰하고 나면 살려주자며 놓아줬겠지만, 그 수컷에게는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둘째는 일어나자마자 장수풍뎅이를 찾았고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한참이나 실망했습니다. 장수풍뎅이 키우기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저는 죽은 장수풍뎅이를 땅에 묻어줬죠.      


장수풍뎅이 키우기 하루밤 천하가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아이들이 겨울옷을 입고 있었으니 서너 달 지났을 것 같은 아침. 등원하는 차 안에서 둘째가 그럽니다. 

“엄마, 내가 키웠던 장수풍뎅이 있잖아. 천국 갔을까?”

장수풍뎅이가 참 좋긴 했나 봅니다. 곤충도 천국에 간다고 알려줘야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큰 애가 그럽니다. 

“아닐걸. 엄마가 묻어줬어.”

둘째는 당연하다는 듯 형의 말을 받았습니다.

“그럼 천국 갔겠네.”

하지만 큰아이는 확고했습니다. 

“아니.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거야. 엄마, 뼈가 썩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했지?”     

큰아이가 왜 아직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는지, 그게 뼈가 썩는 일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질문에 질문으로 답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은 자연관찰 책에서 나온 용어를 사용해서요. 

“평아, 장수풍뎅이에 뼈가 있을까? 절지동물은 무척추동물이니까 말이야.”

잠깐 생각하더니 큰애가 그럽니다. 

“엄마, 내가 삼촌 창고 앞에서 죽은 장수풍뎅이 여름에 발견한 적이 있잖아. 묻어줬거든. 어린이집 갔다 와서 파봐야겠어.”      


운전 중이라 당시에는 큰 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죽으면 흙에 묻고 그럼 썩어서 흙이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천국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두 가지 사실이 큰아이 머릿속에서 종합되어 형체가 다 썩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다시 온전한 형태를 이룰 수 있으니 말입니다. 큰애는 죽음과 천국에 관한 제 이야기를 듣고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일종의 공간이동으로 정리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전 온 산을 누비며 참나무즙을 마음껏 먹는 장수풍뎅이보다 훨씬 행복했습니다. 제 마음에 가득했던 감흥,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육체, 죽음, 그리고 천국에 대해 큰아이가 종합적으로 이해한 논리성을 발견한 아침. 아이들도 생각한다는 걸, 그것도 매우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합니다. 순수합니다. 그러나 순수함은 논리성의 반대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인정하고 기대하며 생각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자극해주면 아이들은 멋진 사고의 날개를 활짝 폅니다. 그 정확함에, 논리성에, 창의성에 어른들은 놀라기도 바쁠 지경입니다. 그리고 질문하기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사고력을 북돋는 최고의 자극이 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질문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뭘 알겠냐고 쉽사리 단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알 수 있는 능력은 별개라는 점입니다. 어른보다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어른보다 미미할 수는 있습니다. 아직까지는요. 하지만 알 수 있는 능력, 곧 생각하는 힘은 아이들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과소평가하며 미리 정보를 차단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이야기할 때 쉽사리 동조하지 않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떼를 쓰는 게 아이들이라는 겁니다. 마트에서 대성통곡하며 떼를 쓰는 아이들이 어떻게 논리적이냐는 주장이지요. 맞습니다. 아이들은 떼를 씁니다. 아이들이 떼쓸 때 얼마나 난처한지 잘 알지요.      


그런데 떼라는 게 뭔가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 감정적 서운함을 표현하는 방법, 아닐까요? 아이들이 감정처리에 미숙해서 나오는 반응이지요. 요즈음 유아 충치의 원흉으로 대두되는 간식이 있습니다. 바로 마이쮸로 대변되는 캐러멜입니다. 치과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달콤한 것도 문제지만 치아 틈에 딱 붙어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서 충치에 더 안 좋다고 하시더군요. 눈앞에 있는 달콤 쫀득한 캐러멜을 하나 더 달라고 아이가 요구합니다. 엄마는 그만 먹자고, 이 썩는다고 하겠지요. 여기서 멈추면 아이가 아닙니다. 다가올 충치라는 위협보다는 캐러멜의 달콤한 유혹이 훨씬 더 강력하니까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 더 강력하게 요구하는 아이들의 언어, 떼가 발생하는 시점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알고 있습니다. 캐러멜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는 것을요. 어떻게 알까요? 엄마가 말해주었거든요. 책에서 보기도 했고요. 텔레비전 교육프로그램에서도 본 적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단것 많이 먹으면 입안에 충치세균이 번식하고 충치가 생겨서 치과에 간다는 것을요. 몰라서 떼를 쓰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떼란, 아이들이 논리적이지 않다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격앙된 감정적 요구수단일 뿐입니다.      


이게 아이들만의 특징일까요? 저는 초콜릿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초콜릿이 들어간 모든 걸 사랑하죠. 단, 화이트 초콜릿은 제외입니다. 제 기준에 코코아 파우더 한 톨 들어가지 않은 화이트 초콜릿은 초콜릿이 아니거든요. 아무튼, 전 논리정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초콜릿의 칼로리와 제게 넘치는 살들의 관계를 말이죠. 청바지 입었을 때 좀 더 예쁜 핏을 원하는 저로서는 고칼로리 간식인 초콜릿 쿠키는 ‘이성적, 논리적’으로 판단할 때 단연 피해야 하는 간식입니다. 맞죠? 그런데 실상은 어떨까요? 저는 가방마다 비상용 초콜릿을 넣어두고 다니는 사람이랍니다. 당 떨어지면 인격도 바닥을 치니 그런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제가 성인이니, “살을 뺀다면서 초콜릿 먹지 말자.”라고 말하는 엄마도 곁에 없고, 계속해서 먹겠다고 주장했을 때 제 손에서 초콜릿을 뺏어갈 사람은 더더욱 없으니 제가 떼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치아 건강에 안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캐러멜은 먹어야겠다고 우리 집 둘째가 그러듯이, 칼로리가 높은 건 알지만 초콜릿은 먹어야겠다고 침묵의 떼를 쓰며, 초콜릿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떼는 처리되어야 할 감정의 문제일 뿐, 이성적인 판단력과는 무관합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른보다 순수해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죠. 그러니 우리는 아이들이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이 미숙하다고 해서 아이들의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섣불리 정보를 차단하는 대신, 대화하며 많은 정보를 주고 질문을 통해 생각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부여해야 합니다. 설사 어른인 나에게도 복잡하고 어려운 정보라 해도 차근차근 함께 풀어나가자는 마음으로 한숨 크게 들이쉬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니 잘 듣고 이해하라며 강의하듯 설명하는 대신 생각할 거리를 질문하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입니다. 질문받은 아이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생각하는 능력은 질문을 먹고 커집니다.      


새로운 자극과 정보를 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며 주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는 아이들! 이 멋진 존재들이 바로 우리의 다음 세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이들이 성장해갈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맡은 어른입니다. 먹기 싫은 사료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푸아그라, a.k.a. 지방간을 만들 수는 있지만, 거위에게 생각하는 법을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주입식 교육으로는, 문제를 풀기 위해 지식을 이용하는 방법은 가르칠 수 있을지언정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력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사고력의 성장은 질문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곁에서 커가는 다음 세대에 질문해야 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질문해야 합니다. 감정처리가 미숙한 유아여도, 자기표현이 미숙한 어린아이여도 바로 지금이 질문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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