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마음이 가는 후배가 있었다. 알게 모르게 내가 의지를 많이 했었고, 직장 동료가 아닌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고 싶을 정도의 애정 하는 후배가 갑자기 병원을 그만둔다고 했다.
평소에 힘든 기색도 없었고, 그만둘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선생님께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 나 나름대로, 후배에게 든든한 선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두는걸 한마디 상의 없이 통보했다는 게 내심 서운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힘들어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작년 여름쯤 직장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일이다.
"삼 교대 하시는 건 건강에 안 좋아요. 여자 같은 경우 유방암 걸릴 확률이 일반인에 비해서 두세배 이상 높습니다. 이왕이면 안 하시는 걸 추천드리지만... 꼭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시고 잘 때는 어둡게, 암막 커튼을 치고 주무세요"
아니 그러니까, 삼 교대 하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거지? 규칙적인 생활은 내가 하고 싶어도 힘들고.. 암막커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불규칙해서 잠도 안 오는데..
본인일 아니라고, 저렇게 말씀하시나? 내가 지금 교대근무 한지가 15년 되었는데, 뭐 그럼 나는! 조만간 아플 거라는 얘기야 뭐야...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 해주시는 얘기지만 사실 기분이 나빴다.
어느 날 이런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 교대근무, 수명을 단축하는 길"'
나도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무섭고, 두렵다. 토끼 같은 딸이 둘이나 있는데, 다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자꾸 그래~~
그만두겠다고 했던 후배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이다. 젊고 이뻐서, 어디든 취업이 가능하고, 아무래도 미혼이다 보니 선택의 폭이 자유롭다. 꼭 삼 교대를 하지 않아도 간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내가 삼 교대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힘든 만큼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 직장인들보다 시간 활용이 자유롭기도 하고, 일반 상근직에 비해서 보수도 조금 센 편이다.
명절, 연휴, 주말에 쉬지 못해 아이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고 현타가 종종 오기도 하지만, 사실 서른 후반 이 나이에 다른 직장에 가서 적응한다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다. 사람마다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 뭐가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지만 갖다 붙이기 나름이지 뭐.
" 후배님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너의 길을 찾아봐. 하고 싶은 거 도전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꼭 너에게 맞는 조건 좋은 직장을 찾았으면 좋겠다"
나는 진심으로 이 후배가 잘되길 바라고, 잘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영어도 잘하고 도전 정신도 강하고 성격도 무진장 좋다. 무인도에 떨궈놔도 뭘 해서라고 꼭 살아남을 아이.! 그래서 너의 성공을 믿는다.
" 내가 진짜 딱 3년만 하고, 간호사 그만둔다."라고 했는데 벌써 15년이 지났다.
내가 신규 간호사 때 그러니까 15년 전, 생각보다 임상의 길이 쉽지 않음을 느낀 나의 동기들은 탈임상을 꿈꿨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기도 하고 , 엔클렉스 (미국 간호사 자격시험)를 따서 미국 간호사가 되기 위해 문제집과 인강을 들으며 공부하기도 했었다.
그 어려운 공부들이 힘든 병원생활을 하면서 병행될 리가 없었다. 나 또한 도전했었고, 금방 포기했었다. 더 큰 대학병원에 가기 위해, 이력서를 넣기도 했었고, 전문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그 힘든 상황들을 탈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언가 도전했던 것 같다.
그때야 결혼 전이었고, 젊었으니까 아이들이 없었으니까 뭐든지 가능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느 순간 현실 만족하며 AI처럼 일의 무한반복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불행하다는 게 아니다. 행복하고, 안정적이며, 무난한 일상들이다. 다만 그만둘 수 있는 결단력을 확실히 내리고, 시행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후배가 부럽다는 거다.
그동안 수고했고 고마웠다. 후배에게 케이크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해줬다. 아쉽고 또 아쉽지만 쿨하게 보내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아침에 출근하니 사물함에 선물과 감동 어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왜 나는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인가..
"선생님께 롤 모델이라고 한다면
야~ 무슨 또 롤 모델이야. 아부쟁이 아부하고 있네.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요.
퇴사에 대해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해요.
예전에 쇼핑을 좋라 하셨던 선생님은, 남편에게 들키지 않고 택배 박스를 버리는 법을 알려주셨죠.
지금은 재테크 여왕으로 변신하셔서 조언해주시고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제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떠나서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노력하고 계시니 200% 성공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어제 좋은 꿈을 꿨는데, 이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했던 걸까? 연차만 쌓인 오래된 간호사, 딱 그 정도로만 나 자신을 생각했는데, 후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니 참 고마웠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은 거 다해. 젊어서 좋겠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게 아니다. 이번 연도에 나는 학부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현실에서 무엇에 도전하고 새로 이직을 해서 새로운 환경을 적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3.4월을 아이 학교 적응 문제와 이른 하원 시간 때문에, 수선생님과 상의 끝에 육아 휴직을 쓰기로 했다. 왜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 많은 직장맘들이 경력단절을 하면서까지 그만두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일을 놓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이게 내 직업이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간호사인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니까.
직장에서의 선후배 관계가 아닌, 언니 동생으로 연락하며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