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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선 Sep 21. 2020

여행지의 성추행과 캣콜링, 여성여행자의 고충을 나눕니다

<웰컴 투 삽질여행> 누구야? 내 엉덩이 만진 놈이

<웰컴 투 삽질여행>

누구야? 내 엉덩이 만진 놈이



독일의 소도시 트리어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본 교환학생 시절 만났던 독일 친구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출발지인 파리에서 트리어까지 가기 위해서는 독일 국경을 넘자마자 다른 기차로 환승해야만 했다. 짧은 환승 시간에 나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역사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나는 40L짜리 배낭을 멘 상태로 간식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콱 움켜잡은 것이다.

‘야이씨, 이거 성추행이다.’

수치심은 모르겠고 당혹스러움과 멍함이 먼저 찾아왔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그런데 사람이 너무 당황스러우면 비명도 안 나오더라. 그냥 ‘뭐지?’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상황 파악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 사이에 성추행을 한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가해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엉덩이를 움켜잡은 건 백인 노인 남성이었다. 소리를 지를까? 뭐라고? 영어로? ‘저 사람이 나를 성추행했어요’는 영어로 어떻게 말해? 영어로 말하면 알아듣긴 해? 소리를 지르면 독일 법은 내 편을 들어주긴 해? 잡으면? 잡으면 뭐 어떻게 할 건데? 나에겐 저 사람과 싸우고 있을 시간이나 있나? 어떻게든 저놈의 인생을 조져보고 싶은 심정과 저따위 인간 때문에 귀한 내 시간을 쓰기 싫은 마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다시 기차를 타야 할 시간이 빠르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그냥 기차를 타러 갔다. 저놈을 조지는 데 내 시간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기차에 타서도 계속 그 생각만 들었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저 새끼를 조져놨어야 했는데 조지지 못했다’라는 허탈감뿐이었다. 독일의 성추행 형량은 솜방망이 처벌하는 우리나라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 그래도 독일이 자국민을 더 보호해주려나? 하지만 어차피 나는 알고 있다. 미친놈 하나 때문에 내 여행 전체를 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아마 가해자도 이런 걸 계산하고 저지른 범행인지도 모르겠다. 여행하는 외국인 여자는 자신을 고소하기 힘들단 사실을. 적어도 비명이라도 지를 걸, 적어도 한국어로 바로 욕이라도 할 걸. 그 와중에 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또다시 피해를 볼 다음 여성이 생각났다. 나는 피해자일 뿐이고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트리어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성추행당한 이야기를 당장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는데, 왠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관뒀다. 그날 저녁엔 친구가 다른 한국인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한국인을 만나니 그 얘기가 마음 편하게 나왔다.

“저 사실 오는 길에 성추행 당했어요. 독일 국경 넘자마자요.”

그날 처음 만난 여성분은 그 사실에 같이 격분해주었고, 결국 내 친구 귀에도 그 사실이 들어갔다.

“저런, 정말 운이 안 좋았네! 독일에서 그런 일은 나도 딱 한 번밖에 안 겪어봤는데, 오자마자 겪다니.”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아니 적어도 독일인 여성이었다면 이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 일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수치심은 들지 않는다. 그저 나의 소수자성을 한 번 더 인식했을 뿐이다. 얼마나 내가 만만해 보였으면 나를 노렸을까? 지금껏 운 좋게도 단 한 번도 길거리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진 말이다. 내 체구는 한국인 여성 평균에 비해 작지 않다. 그 말은 즉, 내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집단에는 속하진 않는단 뜻이다. 게다가 평소의 인상이나 스타일도 연약한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지의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나 싶다. 그 보호막이 깔끔히 해제된 이곳에서, 나는 이리도 쉽게 성추행에 노출되어 버렸다. 


2018년, 프랑스는 캣콜링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캣콜링. 지나가는 고양이를 부르듯, 남성이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성희롱성 추파를 던지는 행위다. 단어에서부터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한테 플러팅도 못하냐’며 징징대는 이들이 있지만, 플러팅과 캣콜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위협과 추행이 되는 행동이 어째서 플러팅이 될 수 있겠는가.

프랑스 사회는 오랫동안 캣콜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대표 페미니즘 입문서로 꼽히는 토마 마티외의 『악어 프로젝트』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은 프랑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공감하기 쉬운 만화로 그려냈는데, ‘선진국이라 불리는 프랑스 여성들도 비슷한 고통을 겪는구나’ 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자국민인 프랑스 여성들도 길거리에서 캣콜링을 당한다는데, 동아시아 여자가 가면 어떨까? 심하면 더 심했지 덜할 리가 없었다. 역시나 고양이 취급, 정말 무수하게도 받았다.

한번은 루브르박물관에서 관람을 마친 후 지하철 역사로 들어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오른쪽으로 프랑스 남자가 걸어오더니 “봉쥬르” 하며 귓속말을 걸면서 숨을 불어 넣었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어 오른쪽으로 휙 돌아보았더니, 그 남자는 이미 나를 지나쳐 왼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다시 돌려 그가 사라진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내 반응을 살피면서 히죽 웃고는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니하오’라고 안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지.     


유럽 사회에서 아시안과 여성이라는 조합은 정말 최악이었다. 사회 소수자 성질이 무려 곱하기 2! 지나가는 강아지 취급당하기 1위! 그런 얘기가 있다. 서구사회에서 인종별로 서열을 나누면 백인, 흑인, 황인 순이라고. 여기서 일반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의 인권이 높은 백인이나 흑인과 달리 동양인만큼은 여성의 서열이 위란다. 해석하자면 백인 남성의 ‘여자’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동양 남성보다 동양 여성의 신분이 더 높다는 얘기다. 반면 서양 여성들은 동양 남성에게 별로 성적인 흥미를 못 느끼니 서열이 더 하위라는 뜻이고. 동양인 남성보다 더 높은 신분을 획득했다고 한들, 하나도 기쁘지 않다. 서양 남성이 부여한 그 서열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시안 여성의 현실은 하루하루가 캣콜링의 연속인 것을.

지금껏 당한 인종차별 또한 되짚어보면, 사실 이중의 반은 내가 아시안이자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일이 아닐까? 얼마나 만만하겠어! 내가 당한 인종차별의 90%가 이미 남성에 의한 폭력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니하오’에는 이미 캣콜링 같은 성희롱성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짜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아시안 여성에게 추행성 멘트를 던져보는 거다.      


몰타에서 내가 거주하던 숙소는 세인트줄리안의 클럽 거리와 매우 가까웠다. 어학원 친구들은 주말 밤이 되면 클럽에 가서 자주 함께 어울렸다. 세인트줄리안의 클럽 거리는 주말이 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린다. 이 중에서 가장 쉽게 타깃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시안 여성이다. 게다가 이놈들은 재수 없게도 많은 아시안 여성들이 백인 남성에게 환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같은 백인 여성들에게는 플러팅 한 번 못하다가 만만한 아시안 여성들에게는 갑자기 자신감이 솟는다!

“니하오! 곤니치와!”

클럽 거리를 걷기만 해도 추근거림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니하오”, “곤니치와” 소리가 진동한다.

“아임 코리안!”

성격도 좋은 친구는 이걸 또 일일이 웃으며 대꾸해준다.

“자꾸 대꾸해주지 마. 쟤네 그냥 아시안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라고. 봐봐. 백인 여자들이 지나갈 땐 아무 소리도 안 하잖아!”     


이놈의 캣콜링은 비단 유럽에서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베트남에서도 지나갈 때마다 귀찮게 말 거는 남자들을 몇 만났다. 한국을 선진국 대접해주는 나라에서까지 나는 그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된 것이다. 중국 소수민족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어찌 보면 내가 그들의 문화를 돈 주고 사서 보는 셈이었는데도, 남자들은 내가 지나가자 “헌피아오량!(예쁘다)” 하며 소리쳤다. 그거 칭찬 아니냐고? 예쁘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얼굴 평가하는 게 어떻게 봐서 칭찬이냐. 몹시 불쾌했다. 어딜 가나 젊은, 아시아, 여자는 성적 물화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몰타에서 만난 중국인 남성이 한번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난 한국 여자가 좋아.”

“왜?”

“중국 여자들은 기가 세거든! 한국 여자들은 여성스럽고 상냥해서 좋아.”

아, 미친. 이게 무슨 ‘김치녀’ 싫다고 ‘스시녀’ 찾는 소린가. 어디서 많이 본 레퍼토리였다. 자국 여성은 ‘기가 세다’며 후려치고 조금 더 ‘고분고분’한 국적의 여성을 찾는 게. 그는 서양 여자들은 남자같이 느껴져서 별로라는 말도 함께 얹었다. 응, 안녕. 짜이찌엔.     


나는 아직도 가끔 여행이 무섭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걱정해야 한다. 일이 터지고 나서는 수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법도 내 편이 아님을 알고 있다. 택시를 타도 편히 잠들 수가 없고, 혹여나 노숙하게 될까 봐 숙소도 항상 미리 잡아둔다. 그럼에도 평소 밤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보다 더 제압하기 쉬운 여자들이 많은데, 굳이 나를 건드리진 않겠지. 나 또한 나보다 더 약자인 이들을 방패삼아 안전을 구축해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더 약자의 위치에 있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가시화조차 되지 않은 동남아 여성들이나 체구가 작고 어린 여성들의 모습이. 오늘도 겸허히 배워간다. 내 안의 여성혐오와 싸우고, 더욱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 이 글은 <웰컴 투 삽질여행>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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