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온전히 존재하고 싶어서
2016년 9월, 평범한 날이었다.
두 딸을 어린이 집에 보내고, 만삭이 된 배로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간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점심도 먹지 않았고, 화장실만 한두 번 다녀왔다.
'이, 바보 머저리야. 맨날 시간이 없다면서, 하고 싶은 것도 많다면서 시간을 그렇게 쓰고 싶니? 이 못난 인간아....'
자괴감이 밀려와 내 머리통을 한대 새게 쥐어박았다.
세수도 안 한 얼굴이 현관에 붙은 거울에 비쳤다. 끔찍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소녀였다. 알바, 연극, 해외 취업, 그리고 대학 조기졸업까지.
시간을 쪼개 계획을 하고, 열심히 살면 생각한 대로 되었다. 되고 싶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에 현모양처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그 안에서 보호받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처럼 하고 싶은걸 다 하면서 현모양처도 가능할 줄 알았다.
스물넷, 첫아이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건 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우울과 회복을 반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쁘고, 가정은 소중해서 두 딸을 낳고 키웠다. 이십 대가 그렇게 다 가고, 서른이 되었다.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으니 대학원도 가고 새로 시작하려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셋째가 찾아왔다.
나날이 부르는 배를 보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현실도피를 해야 했다. 스마트폰은 딱 좋은 대안이었다.
하원 후, 기분이 좋은 첫째가 만삭인 내 배를 끌어안으며 갑자기 물었다.
"엄마! 엄마는 꿈이 뭐야?"
일곱 살. 한참 장래희망에 관심이 많을 때였다. 똘망똘망한 두 눈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음... 엄마는.... 음...."
한참을 망설였다. 꿈이라니. 생각할수록 괴로워서 마음속 깊숙이 어딘가에 생매장해버린 것 같은 단어였다.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은데, 엄마는?"
"그렇구나... 엄마는... 음... 음.... 아.... 엄마는 작가가 되고 싶어."
엥? 작가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꿈이었다.
'작가?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어?'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때부터 내 머리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나는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이과생이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글 쓰는 일을 진로로 삼을 거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셋째를 출산하고 얼마 후부터 스스로 매번 갸우뚱하면서도 글쓰기를 배우러 다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그냥 인터넷을 뒤져 글쓰기를 알려준다고 하면 무턱대고 찾아가 수업을 듣곤 했다.
흰돌 속에 섞인 까만 돌 같았던 평생을 품어왔던 이질감,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아서 곧 질식할 것만 같았던 우울감,
모두가 잠든 밤이면 깊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한참을 멍하니 혼자 앉아 있던 공허감까지.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글에 녹여 썼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딸, 엄마, 아내, 동료, 친구 등등, 각종 '역할'로만 존재하는 인생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의 샘이 고이게 마련이라는 사실도.
그 모든 이름들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쓰고, 고치고를 5년쯤 반복하다 보니 책이 한 권 나왔다.
그게 끝일 줄 알았는데 그 뒤로 5년이 더 지나도록 나는 이렇게 여전히 쓰고 있다.
왜 쓰는가?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쓰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답변은 언제나 다르다.
아마 이 답을 정의하려면 내 평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답변을 옮겨 본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누군가의 숨구멍이 되기 위해 쓴다.
누군가에게 뭔가가 되겠다고? 되긴 뭐가 되냐.
‘나’나 잘 되자. 아니 '잘'도 빼고, 그냥 내가 되기나 하자.
숨이라도 잘 쉬기 위해, 그래서 혹시나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위해.
쓰자. 실망도 기대도 없이 그냥 숨 쉬듯이.
글은 내 숨구멍이니까.
나는 왜 쓰고 싶은지 한번 적어보세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처럼 마구 휘갈겨 쓰시는 게 좋습니다. 키보드라면 우다다 두드리세요.
그리고 다 쓰고 나면 꼭! 다시 읽어 보세요.
읽은 후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을 메모해 봅니다. 다음 글의 소재가 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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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딘가엔 당신과 꼭 같은 마음을 가진 독자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