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처음으로 화를 낸 남자
"아니,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그가 처음으로 내게 화를 냈다.
착하고 조용한 그가, 아이들이 모두 있는 집 안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화를 냈다.
‘헐?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만나고 2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상처를 받은 건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그가 대견해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저 인간이 드디어 화를 내는구나.’
누가 들으면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내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그는 뽀얗던 아기 때부터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 안쓰러움을 사는 사람이었다. 사춘기를 지난 우리 아이들조차 제 아빠를 안쓰러워할 정도다.
그 이유를 나는 잘 안다. 습관이 되어버린 그의 지독한 '참음' 때문이다.
내 소원 목록 중 하나가 남편이랑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는 것일 정도였다면 내 마음이 조금 전달이 될까. 그랬던 그가 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으니, 이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마치 아기가 처음 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처음 화를 낸 상대가 하필 나였다는 사실은 좀 아팠지만,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일 뿐이었다.
어디 가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고, 집에서, 나한테, 처음으로 화를 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가 소리를 지르자 나는 일부러 목소리 톤을 더 낮췄다. 그가 자신의 폭발을 자각할 수 있도록.
그의 화가 반갑긴 했지만, 더 커지길 바라진 않았다. 내 반응이 미지근하자, 그의 목소리도 자연스레 낮아졌다.
나는 그를 그냥 두고 자리를 피했다.
부엌으로 가서 살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내가 소리 지르고 화내서 미안해."
참나. 착한 사람 아니랄까 봐. 20년 만에 처음 화를 내놓고는, 30분도 못 참고 후다닥 와서 사과를 한다.
"화나게 몰아세워서 나도 미안해. 근데 난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게 아니야."
"알아. 내가 괜히 흥분했지."
"아니야. 잘했어. 앞으로는 무조건 참기만 하지 마. '착한 남편' 나한텐 하나도 안 반가운 거 알잖아. 꾹꾹 참기만 하면, 성장할 기회도 꾹꾹 눌러버리는 거야. 화도 내고, 후회도 해보고, 다시 시도하고… 그래야 성숙해질 기회가 생기지."
나는 그를 꼭 안으며 말했다.
"난 그게 더 힘들어…"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원래 그게 더 힘들어. 화를 내야 할 때, 합당하게 내는 게… 그게 진짜 어려운 거야."
"잘 받아줘서 고마워."
여전히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는 ‘에구 내 팔자야…’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은 꾹 다물었다.
평생 처음 찾아온 그의 변화를 추앙해 주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긴 또 처음인, 그런 재미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