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를 만들어낸 소녀에 대하여
초등 학교 입학을 얼마 앞두고 있지 않았던 일곱 살 가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7년이 지난해, 봄에 결혼을 했다. 그해 여름에 유학을 가려 계획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첫아이가 생겼다. 생각보다 쉽게 유학을 포기했다. 그때 나는 사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가정을 위해 기꺼이 나를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함께. 돌아보면 어려서부터 항상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고, 내 집, 내 가정을 빨리 가지고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이후로 15년이 다 되도록 그때의 포기를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렸는지, 그땐 왜 행복하다 느꼈는지, 왜 그렇게 오랫동안 나는 미련을 부둥켜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인지. 최근까지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세상살이에 훤한 것 같은 표정 뒤에 애정에 굶주린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모성애가 절박한 나머지 스스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임신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의존 욕구가 있음을, 혹은 그러한 욕구를 가져도 좋다고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겉보기와는 달리 속으로는 겁먹은 어린아이인 것을 알았고, 한동안 심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건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 문단에서 턱 하고 걸려버렸다.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 맞은 것처럼 심장이 관통된 느낌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글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세상살이에 훤할 것 같은 표정 뒤에 애정에 굶주린 소녀. 모성애가 절박해서 스스로 모성애를 만들어 낸 소녀. 너무나 의존하고 싶지만, 자신의 의존 욕구를 인정할 수 없는 소녀. 겁먹은 어린아이.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아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일찍 떠난 후, 엄마는 몸도 마음도 집에 없었다. 엄마가 필요한 대부분의 순간에 엄마는 내 곁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오히려 엄마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뒤늦게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엄마와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본인의 천성이 둔감하고 약해서 가장 가까운 이의 마음을 보듬을 줄을 모르는 사람. 상대를 항상 외롭게 만드는 사람. 언제나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 엄마에게 화가 나면 남편이, 남편에게 화가 나면 엄마가, 두 사람은 항상 내 안에서 오버랩되는 존재였다.
내게 사랑은 곧 책임이었다. 그래서 스무 살에 처음 연애한 남자와 헤어질 수 없었고, 아이와 떨어져 다시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흔들리지 않는 모성애를 가진 엄마여야 했다. 내 자아가 반으로 찢어지는 것 같아도 아이들에게 애정의 굶주림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받아보지 못한 모성애를 만들어 내느라 매일 허덕여야 했다. 그 모습이 때로는 나 자신처럼 느껴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이 가정에서 엄마로, 아내로 있는 것, 말 그대로 ‘존’‘재’하는 그 자체가 너무 힘이 들었다. ‘바람처럼 사라졌으면, 먼지처럼 흩어졌으면,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조용히 떠날 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죄책감에 괴로웠고, 아이들 곁에 ‘존재’하느라 웃는 엄마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마침내 나 스스로 일군 온전한 가정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행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구난방,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내 마음의 상태는 오랫동안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너무 사랑하면서도 너무 싫고. 너무 귀하면서도 당장 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안에서 싸우며 마음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격렬했던 싸움의 실마리를 스캇 펙의 책에서 마침내 찾은 것이다.
너무 일찍 떠나버린 아빠와 늘 곁에 없던 엄마. 어른의 보호 아래 거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 나의 내면은 여전히 그곳에서 보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아이들에게 주려고 몸부림쳤던 모성애가 내가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스스로 만들어 내게 주었던 것이라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론 강하고 단단한 척하지만 사실 간절하게 누군가의 보살핌을 바라는 내 모습을 처음으로 바라본다. 아직 정면으로 대면하진 못하고 흘끗 곁눈질로 본다. 사실 ‘간절하게 누군가의 보살핌을 바라는 내 모습’이라는 문장을 쓰는 것조차도 아직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스캇 펙은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적인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주된 과제는 자기가 의식하는 자기 모습을 실제의 그것과 일치시켜 가는 것이다.
어른의 보살핌 아래 안전하게 거하고 싶은 어린아이는 이미 어른의 몸을 가졌다. 모성애가 절실히 필요한 소녀는 이미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떻게 내면에 아이와 겉에 어른을 일치시켜 갈 수 있을까? 의식하는 나의 모습을 실제의 그것과 일치시켜 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또한 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두 손으로 나의 팔을 토닥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