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 꿈이었다.
할머니 집에서 여전히 구부러진 허리로 무릎을 짚고 걸어 다니는 할머니를 붙잡고 얼마나 진을 빼며 울었는지 깨어난 지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린다.
아빠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너무 일찍 상실에 대해 경험해서 나는 상실에 대해 무던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의 장례식에 가서도 슬프지 않았다. 사람에게 일어날 응당의 일이 지금 일어났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곳에 가서 손을 잡아주고 묵묵히 밥을 먹어주고 오는 일은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일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렇게 그립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할머니는 다른 차원의 아픔이다.
상실한다는 것. 그것을 나는 너무 쉽게 보았다. 이미 아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린 날 지나왔던 슬픔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로.
그런 것들이 어디 한 두 개인가.
나는 요즘 나의 경박함에 매우 자주 놀란다. 제대로 경험해 보지도 않고 미리 넘겨짚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내 모습을 직면할 때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쥐구멍을 찾지만 타임머신을 찾지는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럴 때면 언젠가 어린 나에게 왜 그렇게 무심했냐고 엄마에게 물었을 때 엄마가 했던 대답이 생각난다.
"난 돌아가도 그때보다 잘할 수 없을 거다. 그게 내 최선이었다."
그땐 그 말이 또 다른 상처가 되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엄마처럼 나도 살아온 모든 시간이 내게 최선이었다. 부끄럽고 아프게 후회되는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가면 그보다 잘할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재혼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에게 엉엉 울며 나는 이제 아무도 없다고, 나는 고아라고 소리쳤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마음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때 내 마음은 정말 그랬으니까. 이렇게 슬플 때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 내게 있어선 엄마를 그 자리에 인정하는 최선이었으니까.
꿈속에서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할머니를 붙잡고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가만히 있으라고 울었다. 할머니 가버리면 나는 아무도 없다고.
할머니 짐 다 벗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허리 피고 꽃 키우며 지내고 있어요라고 못하고 나는 아무도 없으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할머니에게 울며 매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미워하면서 여기까지 자라왔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면서 내 자존감을 지켰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아를 건강하게 만들었는지.
할머니는 꼿꼿했던 허리가 조금씩 구부러 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게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일까. 안 그래도 곧은 허리를 조금이라도 더 꼿꼿이 피기 위해, 턱을 더 높이 쳐들고 살기 위해 매일 애쓰는 나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끝내 배울 수는 있는 걸까.
뱃속이 허전한데 어딘가는 따뜻한 그런 이상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