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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나 Oct 25. 2023

땡초전은 말이 없지

우리는 가족이 되고 있을까요?

고추가 끝물이다. 

정선에 첫눈이 벌써 왔다고 한다. 여기도  서리가 내릴 것 같아서 텃밭에 나가 고추를 몽땅 다 땄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말릴 수 있는 고추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말리려고 시도한 고추도 제대로 마르지 않고 물러버렸다. 고춧가루를 조금이라만들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찬바람이 불고 나서야 그나마 먹을만한 고추가 몇 개 열렸는데 곧 서리가 내릴 같아서 더 키울 수가 없다니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또 재밌다.

 

 몇 개 안 되는 고추를 냉동실에 얼리물에 씻어 꼭지를 따는데 매운 냄새가 확 올라왔다. 순간 한 가지 장면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이거는 땡초 썰어놓고 매콤하게 하자."


 지난 추석에 어머니가 땡초 넣은 부추전을 하자고 하셨다. 시댁식구들은 다들 매운 걸 못 드시는데 굳이 왜 이걸 하나 싶었지만 별말 없이 을 부쳤다. 매운 걸 좋아하는 나는 칼칼한 땡초전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도 웬일인지 땡초 넣은 전이 맛있다고 연신 이야기하셨다. 


고추를 다 씻어 냉동실에 얼리고 세수를 한 후 화장품을 바르려 화장대에 앉았는데 순간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나 때문에 땡초전을 하자고 하신 걸까?'

 

 친정식구들은 매운 걸 좋아한다. 할머니는 명절마다 밀가루와 땡초, 소금만을 넣은  땡초전을 만들었다. 땡초전은 어릴때부터 명절에만 먹던  별미였다. 몇 년 전 명절에 그게 먹고 싶어서 시댁에서 전을 부치다 후다닥 땡초전을 만들었는데 시어머니께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었다. 아무도 안 먹는 걸 만드냐고. 그 뒤로는 비슷한 요리도 할 생각을 안 했는데 올해는 어머니가 먼저 만들자고 하신 것이다.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에서 육계장을 앞에 놓고 숨죽여 울던 내 모습이 마음에 남으셨을까. 할머니 장례식에 와도 시부모님 앞에 앉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마지막 남아있는 내 비빌 언덕인  할머니가 갑작스레 떠나버려서 여러 가지로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났다. 아이들과 시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를 삼키며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에 함께 가면서도 뭐 하러 그리 멀리 우르르 가냐며 타박을 하시던 어머니가 올해엔 내 생각에 땡초전을 하자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울컥했다. 내 슬픔에 공감해 주는 것이 이렇게도  고마운 일이었다니.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나쁠 것 없는 오해였다. 거울을 보며 스킨이랑 눈물을 같이 발랐다. 

 바짝 올리고 살던 가드가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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