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pr 16. 2024

내 꿈은 발레가 아니라, 발레 자세에 담긴 '품위'였다

꼿꼿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엄마는 내가 아끼는 LP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너무 많이 들어 틀자마자 튀기 시작하는 LP. 몸을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장엄한 레퀴엠을 듣듯 엄숙하게 '백조의 호수'를 끝까지 감상했다. 폐허 꼭대기에서 춤을 추던 오데트가 처연하게 몸을 던지는 순간, 내 첫 꿈도 검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열 살의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소질이 없다는 부모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시작한 지 겨우 1년 만에 발레를 접었다.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발레 학원을 다닌다는 말에 바로 다음날 그곳을 찾아가 등록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진작 못했을까. 매주 두 번 있는 발레 수업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포인 앤 플렉스 (point & flex), 아나방 (en avant), 앙오(en haut), 그랑 바뜨망 (grant battement)…몸은 뻣뻣하게 굳었지만 이국적인 발레 용어를 들으니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서너 달이나  배웠을까. 지인을 도와 의자 몇 개를 날랐을 뿐인데, 다음날 허리가 아파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병원을 전전하며 꼼짝없이 몇 달을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허리디스크였다. 양의와 중의를 오가며 일주일에 몇 번씩 치료 받기 1년 여의 시간, 필라테스로 코어 근육을 회복해 허리가 아프지 않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데까지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환자라는 게 드러나지 않게 일상생활은 가능해졌지만, 더 이상 나비처럼 사뿐 날아올랐다 내려오는 땅 르베 (temps leve)나 시쏜 페르메 (sissone ferme), 앙트르샤-꺄트르 (entrechat-quatre) 같은 동작을 할 수 없다.


앙트르샤-꺄트르 (entrechat-quatre) & 땅 르베 (temps leve) (source: Naver)



떨리는 마음으로 샀던 레오타드와 타이즈, 발레 슈즈, 신고서 5초도 제대로 서지 못하는 토슈즈를 버리지 못했다. 발레 용 서랍을 따로 만들어 그것들을 얌전하게 넣어 정리했다.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이렇게 나는 30여 년만에 겨우 되찾은 나의 꿈을 조용히 접었다. 접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미래를 그려볼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건 오직 우아한 튀튀를 입고 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발레 하는 할머니의 이미지다.




발레리나가 한 발로 서서 32회 연속회전을 하거나, 공중에서 발을 좌우 3회씩 교차하는 앙트르샤 씨스 같은 고난도 동작을 해내는 기술에도 감탄하지만, 내가 발레에 매료된 이유는 자세에서 나오는 태도다. 인간은 누구나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발레리나는 뿌엥뜨(pointe)를 함으로 한 점을 제외하곤 중력에서 벗어나 날아오른다. 내가 처한 그 어떤 상황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가볍게 날아오르겠다는 듯이. 어떤 동작을 하든 어깨 좌우 꼭짓점과 골반 좌우를 잇는 스퀘어박스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데, 내게는 그 모습이 세상의 어떤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꼿꼿하게 지키는 모습으로 보인다.



“자세도 예절의 일종이야. 구부정한 자세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부족할 뿐 아니라 얼마간 게으를 거라는 인상을 주는 경향이 있지. 반면 똑바른 자세는 침착성과 참여 정신의 소유자라는 느낌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둘 다 공주에 어울리는 자질이란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중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꼿꼿하게 지켜내는 것. 결국 내가 원한 건 품위였다.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서랍을 가만히 열었다. 그 속에 가둬뒀던 내 꿈을 다시 꺼내기로 한다. 지금의 허리나 무릎 상태로는 발레의 여러 동작을 소화할 수 없다. 다시 발레를 하기 위해 재미없는 필라테스나 헬스로 필요한 근육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내 꿈은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발레를 할 수 있는 몸과 마음, 자세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2,30년 후 나는 자꾸 낙상해 누워 있는 노인이 아니라, 발끝 하나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두 다리가 튼튼한 노인이 될 것이다. 우아한 튀튀를 입고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에 맞춰 발레를 하고, 가난해서 발레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아이들에게 발레의 기본적인 동작을 가르쳐줄 것이다. 돈이나 권력, 사랑 등 세상에 파워를 가진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자신을 지키는 품위가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센지도 함께.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쇠락의 길을 가겠지만, 중력과 균형을 이루는 품위만은 죽는 순간까지 꼿꼿하게!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매거진의 이전글 시아버지의 엉덩이골을 본 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