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교육 파트너십(EEP) 세미나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
환경교육은 교육의 내용과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환경’교육과 환경‘교육’이 그 구분이다. Crouch(2007)은 이를 교육정책에서의 환경교육과 환경정책에서의 환경교육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며, Wals et al.(2008)는 비슷한 구분으로 도구적 목적의 환경교육과 해방적(변혁적) 목적의 환경교육을 구분하기도 하였다.1) 오늘부터 연속하여 적어보고자 하는 글은 보다 교육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것으로,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의 한 장씩을 맥락에 맞게 환경교육적으로 해석하여 생각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환경교육이 기존의 교육학 이론과 어떤 방식으로 접목되며, 기존에 논의 중 어느 지점에서는 충분히, 어느 지점에서는 약간은 모자라게 교육학의 관점을 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삶과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은 교육이다. 1장(“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 )에서 다루는 소제목처럼, 전수에 의하여 삶의 갱신이 이루어지며, 교육은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공교육이라 칭하는 학교교육이 아닐까?
듀이는 긴 책의 서두를 삶의 필연성이라는 화두로써 시작한다. 교육에 중심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 사회를 재생산하는 것이 교육인가? 라고 반문해볼 수 있겠지만, 분명 교육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도) 자리하고 있다.
이와 연장선에서 볼 때, “사회화가 경험세계의 재생산에 목적이 있다면, 교육은 경험세계의 재구성에 목적이 있다(조용환, 1997, p.53)."고도 할 수 있다. 비슷한 목적이지만, 조금은 다른 지향을 사회화와 교육은 수행하고 있지만, 밀접한 연관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논의를 환경교육으로 가져와보자. 조금은 뻔한 논의일 수 있지만, 환경교육에도 분명 2가지 측면이 공존한다.
사회화와 교육을 두고 비교했을 때, 교육정책과 환경정책 속 환경교육이 공존함도 이와 다름아니며, 도구적 목적과 해방적 목적을 가진 환경교육이 드러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바라보고 있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질문을 담길 수 있다. 각자의 “환경교육”은 “환경”교육인가? 환경“교육”인가? 우리가 이 사회를 위해서 만들어 가야하는 환경교육은 이 모두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조용환. (1997). 사회화와 교육. 교육과학사.
Crouch, R. C. (2007). The politics of federal environmental education policy(Doctoral dissertation). Retrieved from adsabs.harvard.edu.
Wals, A. E., Geerling-Eijff, F., Hubeek, F., van der Kroon, S., & Vader, J. (2008). All mixed up? Instrumental and emancipatory learning toward a more sustainable world: Considerations for EE policymakers. Applied Environmental Education and Communication, 7(3), 55-65.
1) 이러한 구분은 필요시 구분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구분과 재결합을 지속하며, 그 본 모습을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다.
이 글은 ‘환경교육파트너십’ 독서세미나 중 민주주의와 교육(존 듀이, 1916) 중 「제 1 장 삶의 필연성으로서의 교육(necessity of life) 」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