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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화 Jun 27. 2021

[배우일기] 첫 발이 어렵다던데

두 번째 발도 어려울 거 같아


나의 첫 상업 드라마의 촬영이 끝났다.


기분이 몽글맹글. 모르겠다. 대단한 역도 아닌데 이렇게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이리 애틋하고 설칠 일인가. 하지만 나는 내 시간 일분일초가 항상 애틋한걸.






마지막 촬영날은 유독 뜨겁고, 유독 습했다. 아메리카노를 연달아 두 잔이나 마셨다. 하루 동안 총 4샷을 먹은 셈이다. 촬영 막바지에 가서는 손이 발발발 떨렸었지만 카페인 때문이었는지 오랜 대기로 인한 피로 때문이었는지 긴장 때문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손이 덜덜, 팔이 추욱. 힘이 없었다.


근데 무슨 일 일까, 가방을 메고 촬영장을 빠져나오니 이상한 힘이 샘솟았다. 조퇴를 하고 집에만 오면 멀쩡해지는 것처럼. 거의 두 달 가까이 주말마다 교복을 입어서 그런가 내가 정말로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건 참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고 되려 나를 설레게 했으며, 의상이 주는 힘이 이런 거구나, 눈치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어 내 안의 무언가가 행복해했다. 사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다 선생님으로 보였다. 그걸 깨닫자마자 그 생각을 한 내가 웃겨서 마스크 뒤로 웃음이 터졌다. 어쩌면 지난 두 달 동안 주말 내내 고등학생으로 살았던 그 순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수도 있다. 그건 내게 너무 매력적이니까.


오늘 대기를 하는 동안에는 교복을 입은 배우들이 책상에 기대어 잠도 잤고, 또 서로를 깨워주고 식사를 했는지 챙겨 묻기도 했다. 물론 고새 친해진 그들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던 처음과는 다르게 서로의 안부를 반말로 물었는데, 거기서 ‘진짜’ 학생의 기운을 느껴버린 나는 또 이상하게 행복해져서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환상처럼 사라진 그 장면이 퍽 아쉬워져 ‘아 진짜 학생들 같네 우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다’ 고 육성으로 내뱉었다. 2015년, 고3이었던 내가 이 말을 들으면 기함하겠다만. 교복을 입고 자고 있는 여배우를 깨워 00아, 밥 안 먹어? 라고 묻던 남배우의 장면. 좋아서 계속 계속 생각났다.


나는 줄곧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비로소 내가 그 안에 들어섰는데. 잘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못 한 것 같다. 풀샷에서 긴장 없이 곧잘 하던 장면도 클로즈업, 바스트로 들어오니까 바로 내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만 아는 실수라 남들은 모를지 몰라도 일단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곧 작품이 방영이 되면 어쩌면 굉장한 실망을 할 수도, 보기에 꽤나 오그라드는 연기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실은 두렵다. 지난 시간 동안 즐겁고 재밌긴 했으나 내가 이 역할을 정말 ‘소화’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한동안 얹힐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이미 내 손을 떠버려 이제는 편집을 하고 세상 앞에 드러날 일만 남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나는 연기처럼 흩어진 연기를 여물처럼 곱씹는다.



으음 첫 발이 어렵지 그다음부턴 쉽다고 했는데.

왠지 두 번째 발도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도 좋아.

아쉬워 많이.

좋아.



오래오래 하고 싶어.

이제 자고 일어나면 다시 다른 살 궁리를 해야겠지.

아마 매일매일을 다시 처절하게 진흙탕처럼 살 수도 있겠다. 배우가 가난하다는 말엔 동의하지 못하지만 일단 나는 가난하니까. 매일매일 이러면 좀 힘들기야 하겠지만 이 벅참을 잊을 순 없어. 나는 아주 작은 것에도 이리 설레는걸. 나는 내가 너무 애틋하고 아까워서 작은 경험에도 이렇게 난리를 쳐야하나봐.



두서없이 곧장 써버린 첫 경험의 기록.

하지만 두서없어서 나는 더 좋다.


이대로 수정 없이 올려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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